미국 정부가 23일 금융시장 불안의 뇌관이던 금융사 부실자산 매입 계획을 발표하자 뉴욕 증시가 급등하는 등 월가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그동안 미 국채 등 안전자산만 찾던 투자자들이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리스크 자산에 투자하려는 경향도 나타난다. 은행 회계장부에서 부실자산을 털어내면 금융시스템이 안정돼 신용공급이 재개되고,경제가 조기에 정상화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따른 것이다.

◆민간투자자 참여 의사 잇따라

세계 최대 채권 투자회사인 핌코와 대형 자산운용사 블랙록,사모펀드인 칼라일 등은 미 재무부의 부실자산 투자펀드에 참여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빌 그로스 핌코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이날 "부실자산 구제방안은 지금까지 나온 정책 가운데 첫 번째 윈윈 정책이 될 것"이라며 "두 자릿수 이상의 수익을 올려 이를 고객과 납세자들이 나눠가질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핌코가 부실자산 운용사로도 참여하겠다고 전했다.

블랙록의 로런스 핑크 최고경영자(CEO)도 이날 부실자산 매입 계획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무부는 5개 정도의 자산운용사를 선정,민 · 관투자펀드(PPIF) 운용을 맡길 계획이다.

이들 민간업체는 정부가 매칭방식으로 펀드 자본금을 출자하는 데다 지급보증을 통해 추가 자금조달까지 지원하는 만큼 매입가격만 제대로 산정하면 부실자산 투자를 통해 장기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부실 여신 매입을 위해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자본금의 6배까지 보증을 제공한다. 부실 모기지(주택담보대출) 증권을 매입한 민 · 관투자펀드는 이를 담보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기간자산담보부 대출창구(TALF)에서 자금을 빌릴 수 있다.

◆강세장 신호탄인가

뉴욕 증시에는 약세장 속 반짝 주가가 오르는 '베어마켓 랠리'가 아닌 본격적인 강세장이 펼쳐질 것이란 기대가 확산되고 있다. 이날 다우지수는 497.48포인트(6.84%) 급등한 7775.86을 기록했다. 특히 금융주의 상승이 두드러졌다. 미 24개 주요 은행주로 구성된 KBW은행지수는 1993년 이후 최대 폭인 26% 급등했다. 이로써 다우지수는 12년 만에 최저치였던 지난 9일(6547.05) 이후 2주일 만에 18.8% 뛰었다. 톰 소와닉 클리어브룩파이낸셜 CIO는 CN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부실자산 정리 계획이 예상보다 호전된 경제지표와 함께 증시의 판도를 바꾸는 '게임 체인저'(game-changer)가 될 수 있다"며 "불마켓(강세장)이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호전된 경제지표로는 2월 기존주택 판매 실적을 꼽을 수 있다. 이날 미국 부동산중개인협회(NAR)는 2월 기존주택 판매 실적이 472만채(연율환산 기준)로 전달보다 5.1% 늘어났다고 밝혔다. 앞서 미 상무부는 2월 신규주택 착공건수가 전월 대비 22.2%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주택 착공건수 증가는 8개월 만에 처음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최근 미 CBS방송에 출연해 "주택시장에 희망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언급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미 금융당국이 보유 증권 평가손의 회계장부 반영을 일시 유예하는 방향으로 시가평가(mark-to-market) 회계제도를 바꾸면 은행들의 부실자산 상각 규모가 줄 것이란 기대감도 시장 분위기를 바꾸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여전히 낙관하긴 이르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가격 산정 어려움 때문에 부실자산 매입이 원활히 이뤄질지 아직 불투명한 데다 1조달러 정도로 은행 부실을 모두 털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란 분석도 있다.

마크 잔디 무디스이코노미닷컴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은행들은 현재 2조5000억달러 규모의 부실자산을 안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며 "1조달러 부실자산 매입만으로는 은행 시스템을 정상화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주택시장 침체가 상당 기간 더 지속되면 증시에 악재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뉴욕=이익원 특파원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