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현장에 상생의 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노동운동 혁신 4인방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한국경제신문이 '경제위기 시대 노동운동의 방향'이란 주제로 마련한 긴급좌담회에서 노동운동의 방향과 관련, 2시간30분 동안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들은 "투쟁중심의 민주노총 운동방식은 하루빨리 청산돼야 한다"며 "새 시대에 진정한 에너지가 되는 노동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윤기설 한국경제신문 노동전문기자= 국내 노동현장에서 가장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오며 주가를 올리는 노조위원장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세계적인 경제위기 상황에서 노조의 역할은 무엇인가.

◆오종쇄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경제위기라는 상황진단에는 이견이 없는 듯하지만 해법은 제각각이다. 각 단위사업장들로선 살아남는 게 목표이지만 처한 형편이 달라 똑같은 투쟁과 대처방식을 강요할 수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중공업 노조는 우선 고용을 선택했다. 복지나 임금은 위기상황을 벗어난 이후에도 충분히 얻어낼 수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정연수 서울메트로 노조위원장=정부의 리더십이 부족하고 정치권이 정쟁에만 매몰된 상황이어서 노동계가 정신을 차리고 사회통합에 일조해야 한다. 노동운동도 계급투쟁에서 벗어나 주인노동운동으로 바뀌어야 한다. 과거 노조는 노동자들을 지시하고 계몽하고 통제하려고만 했는데 이제 그런 구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요즘은 조합원들이 환경에 더빨리 변화하고 적응한다. 자본을 적으로 보는 노동운동에서 자본을 공유하고 창조하는 노동운동으로 가야 한다.

◆김홍열 코오롱 구미공장 노조위원장=20년간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가장 싫어한 단어가 '운동''투쟁''동지'라는 말이다. 노조는 회사를 내부에서 도와주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20년 전에도 나는 투명성만 담보되면 활동가로서 회사를 돕겠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코오롱 노조는 1996년에 민노총에 가입한 뒤 2년에 걸쳐 파업을 벌였다. 화학산업 특성상 파업의 피해가 컸고 공장이 부도위기에 몰렸다. 예전에는 파업하면 돈이 나와 파업을 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10년간 파업을 계속하다 보니 회사의 적자가 커지고 그 피해는 조합원에게 돌아갔다. 이게 조합원들이 바뀌된 계기다.

◆이성희 인천지하철 노조위원장=
공기업과 사기업 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민간기업이 어렵고 국민이 어려우면 국가세수가 적게 걷히고 예산이 위축돼 결국은 공기업도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공기업노조도 사회적 역할을 일정 정도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노조와 경영진이 서로 터놓고 솔직하게 의견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윤 전문기자=구체적으로 노조가 어떤 식으로 달라져야 하나.

◆정 위원장=지금까지 노동계는 국민,시민과 갈등만 빚어왔다. 노동계는 국민에 대한 운동을 한 적이 없다. 노동운동이 존중을 받으려면 소비자와 국민을 대변하는 노동운동으로 가야 한다. 노동운동의 역사가 60년이 다 돼 가는데 예전의 정체된 이데올로기가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시장경제에 적응되고 자본을 공유하고 함께 창출하는 그런 노동사회문화가 형성돼야 한다. 노동운동이 사회변화 흐름에 끌려가는 게 아니라 선도하고 앞서가야 한다. 노동운동이 국민들 보기에 경제의 발목을 잡고,사회를 어지럽게 하는 게 아니라 이 시대의 진정한 에너지가 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김 위원장= 노조위원장이 된 뒤에 노조부터 구조조정을 해서 조직의 3분의 2 이상을 줄였다. 민주노총부터 탈퇴하고 투쟁이란 글씨를 없애고 동지란 표현을 쓰지 못하게 했다. 회사 측에도 임금동결선언,무파업 선언을 먼저 제안하고 고용보장을 요구했다. 회사의 부탁이 없었지만 자원해서 일본에 건너가 제품 판매 영업활동도 벌였다. 노조가 제품 판촉활동까지 벌이면서 회사 신용등급이 올라가 금융권 대출이 쉬워지고 자금확보가 용이해졌다. 이율도 떨어졌다. 그 혜택의 30% 이상이 조합원에게 떨어졌다. 민주노총 소속 시절 파업만 일삼은 것은 결국 제살 뜯어먹기나 다름없다.

◆윤 전문기자=조합원들의 적잖은 반발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선택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정 위원장=노조가 변화하려고 하면 민주노총 지도부 등에선 "천박한 자본의 행패에 넘어갔다"는 식으로 비난한다. 그들은 노동은 자본과 대립돼야 한다는 사고가 뿌리깊게 박혀 있다. 하지만 시민사회가 노조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져야 하지만 노사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노동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도 필요하다.

◆이 위원장= 총파업을 두 차례 거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2006년 1년간 상급단체인 민주노총에서 보낸 문건 중 집회에 참여하라는 게 109건,총파업 참여독촉이 9건이었다. 3일에 한 번꼴로 집회관련 문서가 왔다. 얼마나 많은 시간 낭비인가. 파업동기도 한 · 미 FTA(자유무역협정) 체결반대,미군기지 이전 반대와 같은 정치 · 사회 이슈가 많다. 이러다보니 민주노총 지도부만을 위한 정치적 투쟁인 경우가 많다. 파업이 끝난 뒤 단위노조 해고자에 대해 민노총이 책임져 주는 것도 아니다. 결국 해고자들의 생계문제는 남은 조합원들의 몫이 된다. 노동운동의 기준을 조합원에 둬야 하지 않겠나.

◆윤 전문기자=인천지하철 노조는 왜 민주노총과 결별하려고 하나.

◆이 위원장=상급단체가 정치이슈를 쫓아갈 수는 있지만 그게 주가 돼선 곤란하다. 현재 민주노총은 하부 노조 문제에 대해 대안을 세우고 이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민노총 탈퇴 결정은 위원장 혼자 독자적으로 판단한 게 아니다. 조합원 설문조사를 했는데 민노총이라는 상급단체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5.6%밖에 안 나왔다. 환경변화에 발맞춘 새로운 노동영역이 필요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 윤 전문기자=현대중공업 노조는 임금교섭을 아예 회사 측에 위임했는데.

◆오 위원장=어려움이 닥쳐서 노조가 대안을 내고 반응하면 이미 늦는다. 회사 사정이 그나마 여유있을 때 대책을 세우고 대비해야 한다. 사측에서 구조조정을 하자고 나온 뒤에 대응하면 수세적이 될 수밖에 없다. 현대중공업의 경우 올해는 과거 수주해 놓은 물량이 있어 큰 어려움이 없다. 2년 뒤에 올 구조조정을 미리 막자는 생각에서 변화를 주도한 것이다. 지금 당장 좋다고 해서 이익을 나눠먹다간 모두 죽으니 닥쳐오는 어려움에 미리 대비하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노조가 미리 대비하고 안 하고의 차이는 배가 항해 도중 태풍이 오고 있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피항하냐 안 하냐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윤 전문기자=코오롱노조도 강경투쟁을 겪은 게 계기가 되지 않았나.

◆김 위원장=과거 코오롱 노조는 민노총이 태동하면서 함께 민노총에 가입했었다. 민노총 가입 후 2006년 탈퇴할 때 까지 5회 정도 파업했다. 2004년에 64일 동안 장기간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위원장과 활동가들이 파업을 접으려고 하니까 민노총에서 간부들이 내려와 "끝까지 가면 무조건 이긴다"고 몰아붙였다. 그래서 파업이 길어졌다. 파업이 끝난 뒤 무노동무임금 원칙이 적용되면서 임금의 30%가 깎였고 509명이 정리해고됐다. 당시 민주노총 고위간부들은 파업 도중 "이미 절반의 성공은 거뒀다. 난 국회의원 되는게 소원인데 9시 뉴스에 얼굴 나오면 되는데 이미 여러번 나왔다"고 발언해 격분했던 기억도 난다.

그게 민노총 실상이었고 민노총에 의한 조합원의 피해가 커져 변화를 선택했다. 조합원 총회에서 90% 이상이 민노총 탈퇴에 찬성했다. 사실 그때까지 우리가 민노총의 홍위병 노릇을 했는데 계속된 파업의 여파로 결국 1992년부터는 인적구조조정이 시작됐다. 섬유산업이 사양산업이 되면서 노조에서도 구조조정을 막을 명분이 없었고 인원이 5분의 1로 줄었다. 파업의 피해가 우리에게 돌아왔다.

"이념에 묶이면 세상 변화 못 읽어, 노조도 끊임없는 자기 혁신 필요"

◆윤 전문기자=변화과정에서 조직 내 강경파로부터 '어용'으로 몰리며 고생들을 많이 했을것 같다.

◆이 위원장=민노총에서는 말로는 강한 투쟁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런 것이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집회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그렇게 했는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그게 바로 어용이다. 말과 구호만 난무하고 있는데,회사에서 돈을 받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조활동을 벌인다면 그게 어용이다. 조합원을 위해 활동한다면 어용이 될 수 없다.

◆김 위원장=20년 전부터 노조활동을 하면서 회사를 위해 도울 것은 돕겠다고 밝힌 뒤 '어용'이라는 공격을 끊임없이 받았다. 노조 활동가들은 순수하고 깨끗해야 한다. 경마에 출전한 말처럼 앞만 보고 뚜렷한 자기 주관을 가지고 끊임없이 채찍질해야 한다. 노조활동도 오래하면 귀족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노조활동은 빨간물도 파란물도 들어선 안 된다. 주관과 신념을 가지고 해야 한다.

◆윤 전문기자=노동운동을 변화시키는 선구자적 시각을 갖고 있다. 노동운동에 대해 어떤 철학을 갖고 있나.

◆정 위원장=1987년 초대 지하철노조 법규부장을 한 이래로 파업도 많이 하고 투쟁도 많이 해봤다. 그동안 경험을 통해 살펴보면 시민을 등진 싸움에선 반드시 졌다. 지금까지 노동운동하면서 사회적으로 폄하되고 존경받지 못하는 이유는 노동운동이 주인운동이 아니라 달라고만 하는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근본적으로 고쳐져야 한다. 노동계가 주인운동을 할 때만이 국민들이 사회정책에 대한 지분을 노동계에 줄 것이다. 현재 노동운동은 스스로 이념에 묶여 있고 자기비하나 하면서 자본에 건강하게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오 위원장=세상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는 데 중요한 것은 노조가 변화에 끌려가느냐,주도하느냐의 문제다. 노조도 사람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고 활동해야 한다. 노조가 섬김이란 단어,서비스 정신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조합원들은 이념이 훌륭해서 따라오는 게 아니다. 노조 지도부에 대한 존경과 감동이 있어야 한다. 노조가 끊임없이 자기를 변화시키면서 세상의 변화를 읽어내고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

◆이 위원장=거창한 철학 이전에 우선 노조부터 투명해져야 한다. 노조가 투명할 때 회사에도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또 토론을 통해 대안을 도출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예전에는 문제가 생기면 두들겨 부수고,붉은 띠 매고 회사 앞에 드러눕고 그랬지만 앞으론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가야 한다.

◆윤 전문기자=노동운동이 이념에 매몰돼 있어 현실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다.

◆정 위원장=실제 정치파업과 이념투쟁을 주도했던 지하철노조들로선 고민이 많다. 파업주도 혐의로 인천지하철은 아직도 해고자가 5명,대구는 13명이 있다. 서울지하철은 17명,도시철도는 13명 해고된 상태다. 규모가 작은 노조에선 해고자임금 문제를 감당하기 어렵다. 민노총은 파업을 시작해 놓고 해고당한 사람에 대해선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전국의 지하철 노조가 모두 고민하고 있다. 광주와 인천지하철은 조합비를 내지 않아 민주노총으로부터 정권(권한 정지)된 상태다.

◆윤 전문기자=앞으로 노동조합은 어떤 모습으로 변화돼야 하나.

◆오 위원장=노동조합의 요구가 대화나 타협을 통해 해결되면 투쟁은 끝난다. 하지만 노조들은 투쟁을 잘하는 게 좋은 노동운동으로 본다. 앞으로 투쟁보다는 단결을 잘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단결하자고 떠드는 사람들 중 정작 자신은 분열을 일으키고 분파주의,편가르기 하는 사람들이 많다.

◆김 위원장=개인적으로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 위원장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한노총과 민노총을 믹서기에 넣고 갈아버리고 싶다고 말한다. (양대노총의 중간쯤 되는 노선으로 노조가 생기면) 노동계를 책임질 단체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다. 한국노총은 현실에 안주했고,민주노총은 활동가들만 중심이 돼 있다.

◆정 위원장=노조는 시장을 배제하고 노동운동을 펼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한국노총은 자주성이 없고,민주노총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장경제 속에 있는 게 노동운동인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시장경제에 적응하고 시장경제를 견인하는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

정리=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