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한 여유자금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온 대형 조선업체들의 현금흐름에도 이상징후가 포착되고 있다. 신규 수주가 끊기면서 선수금이 들어오지 않는 데다 기존에 수주한 선박의 건조대금 유입마저 늦춰지면서 현금성 자산이 급속히 줄어들고 있어서다.

6개월 이상 수주 끊겨 '돈이 마른다'

세계 1위 조선업체인 현대중공업이 회사채 발행을 검토하고,삼성중공업이 3개월 안팎의 초단기 자금인 CP를 발행하는 등 조선업체들의 '돈 걱정'은 이미 실제 상황이 됐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은 지난해 8월부터 단 한 척의 선박도 수주하지 못하면서 자금흐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삼성중공업도 지난 1월 6억8000만달러짜리 LNG-FPSO(천연가스 생산 및 저장시설) 한 척을 수주했을 뿐이다. STX조선 현대미포조선 한진중공업 등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동안 해양부문이나 특수선 등에서 수주 명맥을 겨우 이어왔지만 최근 들어서는 이마저도 끊겨 버렸다.

언제쯤 수주 물꼬가 트일지도 불투명하다. 조선업을 둘러싼 금융환경은 점점 꼬여만 간다. 올해 초 세운 신규 수주목표는 이미 물 건너가는 분위기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세계적인 해운시장 침체와 더불어 최근에는 동유럽발 제2 금융위기 가능성까지 제기되면서 조선 · 해운 시장이 더욱 얼어붙고 있다"며 "신규 수주는커녕 선사들의 잇따른 발주 취소 및 인도 연기 요구로 이미 받아 놓은 물량을 지키기도 벅차다"고 하소연했다.

'현금 확보전쟁'에 내몰린 기업들

조선업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다른 업종의 대기업들은 이미 올해 초부터 운영자금 확보를 위해 대규모 회사채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해운업계에서는 업황 부진으로 인한 '생존형' 회사채 발행이 잇따르고 있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연료비와 용선료 조달을 목적으로 지난달 각각 3000억원과 200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STX팬오션도 1500억원의 자금을 회사채를 통해 마련했다.

장기 불황에 대비해 미리 현금을 확보해 놓으려는 기업이 줄을 잇고 있다. 현대 · 기아자동차그룹은 기아차(4000억원) 현대제철(3000억원) 등 주요 계열사를 포함해 올 들어 2조원 가까운 회사채를 발행했다. 내수 및 수출시장 침체로 인한 자금 경색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그동안 회사채 발행을 꺼려왔던 삼성그룹 계열사들도 두 달 동안 8000억원가량의 회사채를 쏟아냈다. SK그룹과 롯데그룹도 각각 1조원에 가까운 돈을 채권 시장에서 끌어들였다. 한진그룹 두산그룹 LG그룹 등도 각각 5000억~8000억원 규모의 자금을 조달했다.

국내 대기업 중 현금흐름이 가장 좋은 기업인 포스코마저 최근 5000억원의 회사채를 발행한 데 이어 조만간 대규모 외화채권까지 추가 발행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철광석 · 유연탄 등 원료를 수입하기 위해 필요한 달러는 급증한 반면 수출물량 감소로 사내 달러 보유량은 줄어드는 '미스매치'가 발생한 탓이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회사채 발행이 느는 것은 그만큼 대기업들의 현금흐름에 비상이 걸렸다는 의미"라며 "경기침체가 예상보다 길어질 경우 적지 않은 기업들이 한계선상에 몰릴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장창민 기자 cm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