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과장은 하루에도 몇 번씩 사표를 쓴다. 물론 머릿속으로다. 실제 행동으로 옮기진 못 한다. 딸린 식구를 생각해서 꾹꾹 눌러 참는다. 더욱이 지금은 구조조정 시기다. '밥줄'이 최대 화두다. 30대 초반에 땡처리되는 '삼초땡'을 조심해야 한다. '삼팔선'(38세가 넘으면 구조조정 대상)도 늘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 하는 시대다.

이럴 때 자신의 몸값을 높여 이직한다는 건 허황될 수 있다. 하지만 위기일수록 기회도 많아지는 법.기업들로선 지금이 우수 인재를 채용할 절호의 기회다. 10명을 자르는 한편으론 2명의 인재를 영입하고 있다. 하기에 따라선 얼마든지 몸값을 높여 좋은 직장을 찾을 수도 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직장 옮기는걸 꿈꾸는 건 월급쟁이들의 공통점.이직에 성공한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이직 성공법을 살펴본다.

◆구조조정이 기회다

S증권사의 김용수 차장(42 · 가명).그는 작년 말만 해도 A은행 차장이었다. 평생직장으로 여기던 은행을 떠날 결심을 한 건 작년 11월.경제위기로 명예퇴직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다. 당시 얼추 계산해본 명예퇴직금만 2억4000만원.30개월치 급여와 자녀 2명의 대학등록금을 합친 금액이다. 퇴직금 1억원은 별도였다. 13년차 은행원인 김 차장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던 액수다. 결국 명예퇴직을 활용해 종자돈을 마련하고 직장도 옮겨보자고 결론지었다.

김 차장이 새 직장으로 목표한 건 증권사.은행에서 오랫동안 갈고닦은 프라이빗뱅킹(PB) 업무 경험을 살리자는 취지에서였다. 김 차장은 즉시 헤드헌팅사를 두드렸다. 면접 과정에서 "이적료에 해당하는 사이닝 보너스를 주겠다"는 곳도 있었지만 웃돈이 없더라도 안정적인 S증권사를 택했다. 직급도 차장 그대로였다. 기본 연봉은 8000만원에서 되레 6000만원으로 줄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증권사는 인센티브가 많기 때문에 열심히만 하면 은행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서였다.

김 차장은 구조조정 때 유행하는 명예퇴직을 활용해 이직에 성공한 경우다. 김 차장처럼 능력 있고 자신만 있으면 뭉칫돈을 쥐면서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것이 명예퇴직이다. 잘나갈 때 나가는 것도 방법이란 얘기다.

◆다섯 번 이직해서 꿈꿨던 대기업에 입사


시장조사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강영훈씨(37 · 가명).그는 자신의 꿈인 대기업 근무를 위해 7년간 다섯 번이나 직장을 옮겨 성공한 케이스다. 대학에서 중어중문학을 전공하고 국제대학원을 나온 그의 첫 직장은 직원이라야 고작 20여명인 컨설팅 회사.이후 무역회사,국내 리서치회사,외국계 리서치회사 두 곳 등을 거친 뒤 현재의 직장인 L사에 정착했다. 그러다보니 고대했던 L사 면접 때 "너무 자주 옮기는 것이 아니냐"는 압박질문이 나온 건 당연했다. 그는 "그동안 회사를 옮긴 것은 전문성과 인맥을 쌓기 위한 과정이었으며 목표는 처음부터 L사였다"며 "이제 그 꿈을 이루고 싶다"고 호소했다.

실제 그는 대기업 입사라는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몸값 올리기'에 나섰다. 영어와 통계학 프레젠테이션 기법 등을 공부했다. 그 뒤 목표한 대기업 L사와 거래가 있는 회사로 옮겼다. L사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어서였다. 그곳에서 L사의 업무파트너를 만날 때는 항상 '나의 목표는 당신네 회사에서 세계를 무대로 뛰는 것'이라는 뜻을 의식적으로 내비쳤다. 그는 결국 첫 직장을 잡았던 2000년 이후 7년 만에 목표했던 L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그동안 몸값은 두 배로 올랐다. 강씨는 "핵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소용돌이처럼 목표를 향해 접근해 갔다"며 "이직에 성공하기 위한 비결이라면 본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잊지 않고 꾸준히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MBA로 연봉 60%를 올렸다

국내 정보기술(IT) 벤처기업에 다니던 유지훈씨(33).그는 이직을 위해 경영전문대학원(MBA)을 발판으로 활용했다. 유씨는 첫 직장에서 5년간 연구개발에만 매달렸다. 만드는 물건은 좋았다. 그렇지만 세계에서 통할 만한 전략과 마케팅 능력이 없었다. 비전도 부족했다. 고심하던 유씨가 선택한 건 MBA.과감히 직장을 접었다.

유씨는 작년 8월 서울대 MBA를 졸업한 직후 컨설팅 전문기업인 액센츄어에 자리 잡았다. 전직을 살려 IT분야의 전략 컨설턴트로 거듭났다. 자신의 꿈을 이뤘을 뿐 아니라 연봉도 6000만원에서 1억원으로 60% 이상 뛰었다. 유씨는 "돈을 많이 받게 된 것보다 기술개발만 생각했던 예전보다 사고의 폭이 넓어진 점이 더 만족스럽다"고 자평했다.

조명진씨(30)는 이달 초 전자 대기업을 버리고 로스쿨을 택했다. 졸업 후 전자 관련 특허 전문 변호사로 일하려는 목표도 세웠다. 정년이 없는 평생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물론 변호사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는 게 걸렸다. 하지만 변호사 자격증이 있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큰 위안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조씨는 "로스쿨 진학을 준비하는 시간과 수학 기간을 합해 4년 이상을 투자해야 하지만 평생 전문직이 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강조했다.

◆꿈을 위해 모든 걸 버렸다

장재섭씨(33)는 꿈을 이루기 위해 이직한 케이스다. 그는 작년 말까지 온라인 설문조사를 하는 IT벤처기업에 다녔다. 그곳이 벌써 세 번째 직장.그렇지만 주어진 일은 매번 홍보 관련 업무였다. 예술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는 희망과는 턱없이 멀었다. 결국 작년 말 사표를 냈다. 주변에서는 "지금 같은 시기에 미쳤느냐"며 만류했지만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수소문 끝에 '빌드 아이컴'이라는 IT기업에 새 둥지를 틀었다. 그곳에서 그는 신진 예술가들의 오픈마켓을 구상하고 있다. 직급은 과장에서 차장으로 올랐지만 연봉은 예전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장씨는 "꼭 하고 싶었던 일을 찾은 만큼 올해 안에 승부를 봐야 한다고 생각돼 더욱 열심히 일하게 된다"며 만족해 했다.

정인설/이관우/이상은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