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인사혁명이 윤곽을 드러냈다. 16일 단행된 사장단 인사는 단순한 세대교체 이상의 폭발력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사적체를 해소하고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1993년의 신경영,2000년의 글로벌 경영 선포에 맞먹는 정도의 새로운 변화와 전략을 모색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삼성이 신경영에 이어 또 한 단계의 대변화를 예고하고 있다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제2의 창업'을 선언했던 1993년엔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가 슬로건이었지만 이번엔 '브랜드만 빼고 사람 조직을 다 바꿔라'로 볼 수 있다는 것.사장단을 대거 물갈이한 것도 그렇지만 그룹의 대표기업인 전자와 생명 조직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통 · 폐합한 것은 기존 경영전략에 전면적인 메스를 가하겠다는 선언이라는 분석이다.



◆이건희 전 회장의 불만

삼성은 이번에 사장단협의회 내 고참 사장들로 구성된 인사위원회를 통해 인사안을 마련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해 5월 그룹 회장직을 물러난 이건희 전 회장의 의중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고 믿기는 어렵다. 이 전 회장이 경영일선을 떠나 있긴 하지만 삼성의 변함없는 오너이고 퇴임 이후에도 삼성 경영에 적지 않은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이 전 회장을 만났던 모 사장은 "요즘 삼성 경영시스템에 대한 이 전 회장의 불만이 상당했다"며 "말씀 도중에 '요즘 삼성은 도저히 삼성 같지가 않다'는 지적까지 나왔다"고 전했다.

당초 10여명 선에서 거론되던 퇴임자 숫자가 인사발표에 임박해 18명까지 늘어난 것도 이 같은 기류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비록 세계적 불황으로 모든 사업분야가 어려움을 맞고 있지만 최근 반도체나 디스플레이,디지털 카메라 사업부문의 부진도 이 전 회장의 기대치를 밑돌았다는 관측이다.

◆통렬한 자기반성

이번 인사에는 또 이 전 회장의 의중에 관계없이 삼성 내부의 통렬한 자기반성도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이미 지난해 하반기 외부 전문기관으로부터 경영 컨설팅을 받아 조직 내 문제점과 개선과제를 도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은 우선 내부 경영시스템이 외부 환경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만큼 기동력이 떨어져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일부 조직에선 방만한 운영사례까지 파악된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전자가 감사팀장(윤주화) 자리를 이례적으로 사장직에 보임한 대목만 보더라도 조직 내부의 경각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엿볼 수 있다.

완벽한 일처리와 철저한 사후관리로 유명한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이 일약 '경영 투톱'의 일원으로 부상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된다. 사실 연간 매출이 100조원에 달하는 삼성전자의 경우 일등 기업의 자부심을 뛰어넘어 방심과 자만이 조직 내부에 스며들고 있다는 지적이 없지 않았다. 특히 지난해 구조조정본부 해체 이후 그룹 차원의 경영감시나 진단활동이 사라지면서 주요 계열사나 사업부의 기강도 느슨해졌다는 것.

이 같은 논리로 보면 인사안과 동시에 발표된 △임원 연봉 삭감 △일부 후생복리 축소 △임원수 감축 등의 비상경영계획도 일회성 비용절감 노력이 아니라 차제에 경영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바꿔나가겠다는 의지로 볼 수 있다.

◆글로벌 톱 향한 포석

삼성이 이 같은 혁신을 통해 구체적으로 어떤 경영전략과 전술을 채용할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전 회장이 퇴임 전에 강조했던 '창조경영'과 '글로벌 톱 달성'이라는 목표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창조경영이 글로벌 톱 구현을 위한 방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결국 계열사 사령탑을 맡게 된 신임 사장들의 전략 또한 이 같은 로드맵을 벗어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삼성이 단기간에 예전과 같은 폭발적인 성장력을 보여주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1993년부터 추진된 신경영도 2000년 이후에야 그 효과가 본격화됐기 때문이다. 끝을 알 수 없는 글로벌 불황요인도 감안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삼성은 일단 새 진용 구축을 통해 분위기를 일신한 뒤 중 · 장기 경영목표 달성을 위한 새로운 로드맵 구축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이 전 회장의 외아들이자 삼성의 후계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가 어떤 역할을 해낼지도 관심사다. 바쁘게 국내외를 오가고 있는 이 전무가 실질적인 성과를 도출할 경우 삼성의 경영체제는 이 전무를 중심으로 훨씬 빨리 안정을 되찾을 수도 있는 분위기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