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409호 법제사법위원장실.쟁점 법안 처리를 놓고 물리적 충돌까지 빚었던 국회가 모처럼 열리자 여야 의원은 물론 보좌진들도 바빴다. 민생 관련 법안을 비롯해 시급히 처리해야 할 법안이 산적한 탓이다. 법사위원장인 유선호 민주당 의원이 법사위를 진행하는 동안 기길동 보좌관(55)은 국회TV로 생중계되는 안건 처리 상황을 꼼꼼히 체크하며 TV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오늘 국회 상황이 어떻습니까.

"법사위는 법사위 자체 법안뿐만 아니라 16개 상임위의 법안이 본회의에 상정되기 전에 다 이쪽으로 오니까 일이 많습니다. 게다가 오늘 본회의를 끝으로 국회가 이달 말까지 겨울방학에 들어가기 때문에 오늘 중 다 처리하려고 서두르고 있습니다. "

▼많은 법안을 한꺼번에 처리하면 의원들이 꼼꼼히 못 보고 건성으로 처리하지 않나요.

"국회 전문위원들이 미리 법안을 검토하고 상정합니다. 또 보좌관들이 법안마다 요지와 문제점,쟁점 등을 정리해 주면 의원은 이 요약본을 보고 법안의 내용을 파악하지요. 물론 중요한 법안은 의원들이 꼼꼼히 읽어보고 직접 챙기기도 하죠."

▼국회의원을 보좌하려면 일이 많겠군요.

"물론이죠.정책,정무,지역구 관리,민원 접수 및 처리,홍보 등 기본적으로 해야 할 역할이 많습니다. 국회의원 한 사람의 전체 활동을 여러 분야에서 보좌하는 것이죠.따라서 의원마다 법에 따라 지원받는 6명의 보좌진이 경력이나 전문 분야 등을 고려해 역할을 분담해요. 전문가 출신이면 정책을,당이나 사회단체 등과 연계된 사람은 정무를 맡는 식이죠.따라서 국회의원은 배우,보좌진은 연출자라고 할 수 있어요. 보좌진이 대본은 물론 소품,조명 등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면 의원은 이를 토대로 국민 앞에서 연기를 하는 것이지요. 국민의 공감을 얻느냐 못 얻느냐는 이를 소화하고 걸러서 전달하는 의원의 역량에 달려 있습니다. "

▼보좌관의 창의력,정보 수집 등이 중요하겠네요.

"항상 텔레비전을 켜놓고 국회방송을 보면서 인터넷,뉴스 등을 체크하죠.정치는 정보에 민감하기 때문에 언론인 접촉은 물론 다양한 직종의 친구와 선후배도 많이 만나야 합니다. 뛰는 만큼 아이디어가 생기고 정보도 얻거든요. 국정감사 때도 정부가 제출하는 자료보다 현장에 가서 듣고 준비한 자료가 훨씬 더 도움이 됩니다. 이렇게 수집한 정보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법안을 만들고 새로운 이슈나 쟁점도 개발하죠.이런 뿌리를 바탕으로 국회의원의 활동이 대외적으로 화려하게 꽃피우고 제도가 개선되면 정말 뿌듯하지요. "

▼새로운 법안을 만드는 일이 쉽지 않을 텐데요. 과정을 좀 소개해 주시죠.

"가령 지난해 쇠고기 파동이 터져 관련법을 입안할 땐 힘들었어요. 법사 · 교육을 주로 담당해온 제게는 보건 · 식품 · 농업 분야는 생소해 난감했죠.그럴 때는 관련법을 먼저 보고 해당 분야의 국회 · 당 전문위원의 의견을 구한 다음 의원님과 상의해 법 개정의 초점을 잡지요. 그 다음 법의 체계나 형식,다른 법과의 관계 등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구해 초안을 만든 후 국회 법제실에 입안을 의뢰하면 법 체계와 자구의 적절성 등을 검토한 뒤 완성된 형식의 법률안을 만들어 줍니다. "

기 보좌관은 유신 시절에 대학을 다닌 '74학번'으로 운동권 출신이다. 대학 4학년이던 1977년 서울 사직동 수도교회에서 성탄연합예배를 보면서 '유신철폐' 시위를 벌이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돼 1년8개월간 복역했고 학교에서도 제적됐다. 1980년 '서울의 봄' 때 복학해 졸업한 뒤에는 노동운동에 투신해 성수동과 구로 지역에서 활동했고,산업선교회 간사로도 일했다. 1987년에는 단병호씨와 함께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창립 멤버로 일했다. 당시 그는 정책부장,심상정 의원(민주노동당)이 쟁의부장을 맡았는데 1991년 노동자 집회를 주도하다 두 번째로 구속됐다.

▼국회에는 어떻게 들어오게 됐습니까.

"두 번째로 구속돼 4개월가량 복역하고 나오니 몸도 많이 상했고 집안 살림도 말이 아니었죠.마침 고향(전남 무안) 선배인 박석무 의원(현 한국고전번역원장)이 같이 일하자고 불러서 5급 비서관으로 시작했습니다. (재야에서 제도권으로) '전향'한 것이죠.그게 1992년입니다. "

▼지금까지 함께 일한 의원은 몇인가요.

"박석무 · 조찬형 · 배기운 의원에 이어 현재 유선호 의원까지 4명입니다. 그런데 제가 모신 분들이 많이 낙선해서 안타깝기도 하고 내가 잘 보좌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아 자괴감도 많았어요. 박석무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국민회의를 만들 때 따라가지 않고 꼬마민주당에 남았다가 낙선했고,조찬형 의원은 남원에서 이강래 의원에게 졌죠.두 번 거푸 모시던 분이 낙선하니 저도 보좌관 생활에 회의가 들어 몇 달 쉬다가 배기운 의원과 인연이 닿아서 모시게 됐는데 배 의원은 무소속으로 나온 최인기 의원에게 또 졌으니 참…."

▼모시던 의원이 떨어지면 보좌관도 실직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보좌관 생활은 모시는 의원이 재선해 정치적으로 커 나가야 좋은데 낙선하면 자책감 때문에 마음도 안 좋고 직장도 잃으니 힘들지요. 저는 운이 좋아서 곧바로 다른 의원을 모시게 됐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 국회를 떠나 다른 일자리를 찾거나 국회에서 빈 자리가 나오기를 기다려야죠.4년 임기의 한시적 직장이라 항시 불안한 게 보좌관들의 고민인데,신분보장을 제도화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현실적 방안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

▼지난번 국회 본회의장 농성에도 참가하셨나요. 다치지는 않았습니까.

"네,농성 기간 내내 참여했습니다. 오랜만에 국회에서 투쟁을 하니 감회가 새롭더군요. 물론 당의 방침이기도 했지만 제 삶과 평소 소신에 비춰볼 때 참여해야겠다고 적극 의미를 부여하고 나섰죠.외통위(외교통상통일위원회) 회의장에서 해머와 호스,소화기가 등장했을 때 바로 옆에 있다가 소화전 가루를 온통 뒤집어썼어요. 물도 많이 맞아서 엉망이 됐지요. 다행히 몸이 상하지는 않았습니다. "

▼농성 참여자 모두 같은 생각이었을까요.

"참여하면서도 갈등이 있었겠죠.자발적으로 온 사람도 있지만 출석 부르니까 할 수 없이 앉아 있는 사람도 있었을 테니까요. 어느 집단이나 그렇지 않겠어요? 사실 국회에서 극단적 대립과 물리적 충돌이 있어서는 안 되는데 현장에선 상황 논리 때문에 그렇게 끌려가는 것 같아요. 각자 처한 상황이 있으니까요. 의원들도 개인적으로는 다들 똑똑하고 각 분야의 리더들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집단의 논리를 뛰어넘기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안타까울 따름이죠."

▼함께 사회운동을 하다 금배지를 단 분들도 있는데 정치를 직접 할 생각은 없습니까.

"마음을 완전히 비웠습니다. 정치를 하려면 40대 초 · 중반에 결심하고 그 분야로 뛰어들어야 하는데 저는 마흔이 다 돼서 국회에 들어와 바로 방향을 잡지 못했어요.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나름대로 사회에 기여한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동안 고생한 가족도 생각해야죠.저는 40대 중 · 후반에 직업 · 직장으로서 보좌관 생활을 하기로 방향을 정했습니다. "

▼지역구 관리도 직접 한다면서요.

"의원님이 지역구(영암 · 장흥 · 강진)를 다 챙길 수 없기 때문에 제가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2~3일씩 지역에 내려갑니다. 지역의 당 조직 관계자를 만나 지역 여론과 민원,당원들의 애로사항 등을 듣고 지역 현안 사업에 대해 지자체와 협의도 합니다. 3개 군 가운데 제가 장흥 · 강진을 맡고 있는데 시간이 없어 많이 못 만나는 게 아쉽죠."

기 보좌관은 "정치가 국민들로부터 지탄받는 대상이 된 지 오래지만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와 이슈에 대한 최종 해결책은 정치에서 나온다"며 "정치인을 꿈꾸거나 국정 참여를 원하는 젊은이라면 국회의원 보좌관은 해볼 만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글=서화동/사진=양윤모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