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 장기 경영전략이요? 경영진이 5년 뒤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 포스코 KT 국민은행 KT&G 등 외환위기 이후 민영화된 옛 공기업 임직원들이 털어놓는 자조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최고경영자(CEO)가 물갈이되기 일쑤고,그때마다 조직 전체가 '숙명'처럼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지내야 한다. 최근 임기를 1년여 남기고 CEO가 자진 사퇴하기로 한 포스코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KT와 KTF도 지난해 줄줄이 낙마했다. 지분을 잘개 쪼개어 민간에 매각하는 방식을 취하다보니 절대 지배주주가 없게 됐고,그 결과 정부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서다.

◆무늬만 민영화

작년 말 남중수 전 KT 사장이 사퇴하자 기다렸다는 듯 루머가 돌기 시작했다. "다음은 포스코다. "'설마'라고 생각했던 예언은 착착 현실이 됐다. 포스코 임직원들은 바짝 긴장했다. 정부의 수순이 눈에 보였다.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었다.

김영삼 정부 당시 박태준 명예회장이 물러났고,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김만제 회장이 퇴진했다. 노무현 정권 때는 유상부 회장이 임기 중 자진 사퇴했다. 재계 관계자는 "대기업 특혜 논란을 피하기 위해 지분을 잘게 쪼개는 바람에 '외풍'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취약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라고 지적했다.

KT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남 전 사장이 2008년 3월 재선임되자 곧바로 우려 섞인 루머가 터져 나왔다. "정권을 바꿔가며 재선임된 데 대해 정치권이 불쾌해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남 전 사장의 수뢰 등 개인비리가 드러난 데 따라 불가피한 교체라는 지적이 많았지만,이석채 신임 사장이 사장추천위원회를 통해 선임되는 과정에서 정부의 개입이 과도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불안한 경영권

2006년 인도의 미탈그룹이 유럽 철강의 자존심이라고 일컫던 아르셀로를 합병할 당시 포스코는 적대적 M&A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다. 이구택 회장조차 언론 인터뷰를 통해 "락시미 미탈이 그때 아르셀로 대신 포스코 지분을 공개매수하겠다고 선언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그것만 생각하면 지금도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고 말할 정도였다. 작년 말 기준으로 포스코 지분의 43%는 다수의 외국인들이 갖고 있고 나머지 지분도 국민연금과 시중은행 등으로 분산돼 있다.

2005년 10월에는 KT&G가 호되게 당했다. 미국의 대표적 기업사냥꾼인 칼 아이칸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진땀을 뺐다. 2006년 8월 KT&G는 어쩔 수 없이 대규모 자사주 매입 · 소각을 단행했다. 여기에 2조8000억원이 투입됐다. 이 과정에서 칼 아이칸은 보유지분을 전량 매각해 1500억원을 챙겨 한국을 떠났다.

◆외풍에 취약…파벌 등 공기업 체질 여전

민영화됐다고는 하지만 공기업 체질이 여전하다는 점은 문제로 지적된다. 주인이 없는 조직 특유의 '줄'도 난무한다. 사내 파벌과 관련한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업계 관계자는 "A사의 경우 지연 학연 직군 등에 따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라인'이 있다"며 "새 사장을 선임할 때마다 내부 파벌이 극심하게 이합집산한다는 루머가 빠지지 않는다"고 전했다.

대부분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경향이 강해 임직원들의 비리 소지도 크다. 최근 남중수 전 KT 사장 등 KT그룹 임원들이 수뢰와 납품비리 혐의로 무더기 구속된 것이 대표적이 사례다. "KT는 모두에게 '갑(甲)이다. "이석채 신임 KT 사장이 후보 자격으로 40여일 동안 KT 경영을 들여다보고 난 뒤 밝힌 소감이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