虛虛 청바지ㆍ디카ㆍ만화책 좋아하는 파격속엔
實實 "中ㆍ남미도 내수시장" 글로벌 거상의 꿈이 …

최태원 SK 회장은 매년 초 스위스에서 열리는 다보스포럼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해마다 빠짐없이 참석한다. 그는 지난해 포럼에선 고유가 이슈와 세계 분쟁에 대한 해법으로 선진국과 중진국 간 협력 강화 방안을 제시해 현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시카고대학에서 석 · 박사 과정을 마친 최 회장은 글로벌 무대에서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며 대한민국을 세일즈할 수 있는 재계의 몇 안되는 오너 경영인으로 통한다. 이달 말 열릴 다보스포럼에서도 그는 연사로 이미 예약을 마쳤다.

토론을 즐기고 심사숙고(深思熟考)형 총수로도 평가받는 최 회장의 밑천은 '경청'이다. 신입사원부터 관계사 CEO들까지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간에 자르지 않고 듣는 것으로 유명하다. 본인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란다.

최회장의 또 다른 단면은 ‘파격’이다. 그는 지난해 9월1일 취임 10돌 기념식 자리에서 느닷없이 임직원들에게 큰 절을했다. 그룹 오너의 행동으로는 상상하기힘든 파격이었다.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계 총수들을 대동하고 방북했을때도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공식 연회석상에서 엄숙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과 구본무 LG 회장등을 향해 디지털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댔던 것. 몇년전에는 신입사원이 읽을만한 책을 말해달라고 하자 만화 ‘미스터 초밥왕’을 추천하기도 했다.

심사숙고와 파격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이지만 최회장의성향을 들여다 보는데는 가장 적합한 단어들이다. 최 회장은늘 다양한 시도와 구상을 즐긴다. 그러다가 연초엔 꼭 직원들과의 대화를 위해 사내방송에 직접 출연하기도 한다. 최 회장은또IT(정보기술)기기 뿐만아니라 경영기법 등 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얼리어답터(earlyadopterㆍ신기술신제품이 나오면 남보다 한발 먼저 사용하는 사람)다.

부지런한 생각이 엉뚱함의 원천

하지만 최 회장이 '나 홀로' 즐거움을 추구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모든 오너 경영인이 그렇듯이 매서운 구석이 있다. 지난해 말 SK 주요 계열사 사장을 전원 교체한 파격 인사는 경영자로서의 기질을 잘 보여준 사례로 꼽힌다. 그룹 창립 이후 최대폭의 물갈이 인사를 실시한 배경에는 분위기 쇄신을 통해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비롯된 경제위기를 정면돌파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SK 주력 계열사들이 2년 전 도입한 CIC(사내 독립기업)제도 역시 최 회장의 고집스러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최 회장은 2004년에 이 아이디어를 냈지만 당시 주요 계열사들의 반대에 밀려 관철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최 회장은 "쪼개야 산다. 큰 것은 망한다"는 논리를 계속 편 끝에 결국 SK에너지 SK텔레콤 SK네트웍스 등 3개 주력계열사에 CIC를 도입했다.

최 회장은 또 '생각이 부지런한 경영자'란 평가를 받고 잇다. 엉뚱함의 원천이기도 한 이런 부지런함은 경영현장에 그대로 접목된다. 올해 불투명한 경영환경 속에서 채택한 '시나리오 플래닝'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시나리오 플래닝'은 다양한 경영변수를 감안해 여러 시나리오를 설정하고 이에 대응하는 세부 전략을 세우는 것으로 다국적 에너지메이저 기업 로열 더치 쉘의 경영기법이다.

포커 경영,쥘 것인가 버릴 것인가

최 회장은 1997년 그룹 경영을 맡은 이후 '글로벌리티(globality)'를 최우선 경영화두로 삼아왔다. 스위스 다포스포럼에서 제기된 '글로벌리티'는 글로벌(global)과 어빌리티(ability)를 합성한 개념으로 단순한 글로벌화를 넘어서 글로벌 사업에 대한 능력과 정도를 강조하는 말이다.

SK가 내수기업에서 수출기업으로 변신을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SK그룹의 전체 수출액은 지난해 38조7000여억원으로 2005년(19조원)대비 두 배 이상 늘었다. SK의 위상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룹 매출은 취임 전 37조4000억원에서 78조원대로,재계순위도 5위에서 3위로 껑충 뛰었다. 하지만 절반의 성공에 불과하다는 게 최 회장의 냉정한 평가다.

그는 "SK가 지난 10년 동안 글로벌화에 일부 성과를 냈을 뿐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리티'까지는 가야 할 길이 멀다"고 말한다. SK의 '글로벌리티'는 최 회장이 가장 존경하는 선친을 뛰어넘기 위한 절대 명제이기도 하다. SK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지만 선친이 일궈놓은 정유와 이동통신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SK의 성장동력은 바뀐 게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고 최종현 선대 회장 10주기 추모사에서 "아직도 부친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요즘 최대의 고민은 10년 이상 공들여온 '차이나 인사이더(중국속으로)' 전략을 남미 동남아 등으로 확장하는 것,그리고 미국 등에서 고전하고 있는 통신사업을 조기 정상화시키는 문제들이다. 이런 난제들이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더욱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상황이다.

내년에 만 50세가 되는 최 회장으로선 자신의 글로벌 경영능력을 시험하는 최고의 과제들과 맞닥뜨린 셈이다. 그는 불리할 때 죽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이른바 '포커 경영'의 신봉자이기도 하지만 포기하고 주저앉는 것만으로는 승부를 낼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더욱이 다른 이들이 쥐고 있는 패 또한 그다지 좋지 않은 터.글로벌 SK의 새로운 비상을 꿈꾸는 최 회장이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재계는 주목하고 있다.

손성태 기자 mrhan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