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640킬로비트(kb)면 모든 사람들이 만족할 용량이다. "

1981년,세기의 천재 빌 게이츠가 했던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호언의 20배가 넘는 메모리를 사용하고 있다. 1992년에 혜성처럼 등장한 '서태지와 아이들'을 보고 어느 유명 가수가 내뱉은 말은 더 가관이었다. "멜로디가 부족하네.음도 불안하고….가요계는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야."

미래는 현 시점의 눈으로 들여다보기 어렵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지난 1998년 외환위기 때도 똑같았다. 모두들 망한다고 했다. 삼성도 안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2000년 삼성이 글로벌 도약을 위한 '준비경영'을 들고나오고,현대자동차 그룹이 '글로벌 톱5'를 표방하며 연산 500만대 생산체제에 대한 비전을 발표했을 때 많은 이들은 곧이 믿질 않았다.

하지만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지금,전 세계 어떤 기업도 한국 기업들의 역량과 잠재력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위기를 정면으로 돌파하며 비상(飛翔)하는 장면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약자가 강자를 추월할 수 있는 호기는 불확실성이 고도로 증폭될 때다. 승부의 결과는 경제의 불균형이 해소될 때,안개처럼 눈을 가리던 불확실성이 걷힐 때 비로소 드러난다. IT(정보기술)산업의 거품이 붕괴되던 2000년대 초 애플과 컴팩의 운명이 엇갈렸을 때처럼 말이다. 그저 그런 컴퓨터업체에 불과했던 애플은 일약 디지털산업의 총아로 떠오른 반면 PC업계 최강자였던 컴팩은 경쟁사들에 시장을 내주면서 휴렛패커드(HP)에 흡수되고 말았다.

한국 기업들 역시 다가오는 10년에 대반전,대역전의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한다. 10년 전 디지털 시대의 도래라는 대변화의 흐름에 성공적으로 올라탔던 삼성과 LG는 이제 노키아를 넘어서야 한다. 현대자동차는 언젠가 정상에서 맞닥뜨릴 도요타를 무너뜨릴 비책을 세워야 한다. 포스코는 미탈이라는 거대한 벽을 넘어서야 생존과 번영을 보장받을 수 있다.

물론 지금 한국 기업들이 처한 상황을 장미빛 미래로만 연결할 수는 없다. 수출의존도가 높은 구조 속에서 글로벌 경제가 깊은 불황의 늪에 빠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10년 전의 위기보다 더욱 심각하다는 경고를 흘려들을 수는 없다.

하지만 세계시장에서 경쟁을 벌이고 있는 해외 기업들의 상황 또한 결코 우리보다 낫지 않다. 미국의 자동차 빅3는 사실상 파산했고 씨티를 비롯한 유수 금융회사들도 구제금융을 기다리고 있다. 상대적으로 우월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일본 기업들도 엔고와 매출 감소로 크게 고전하고 있다. 도요타의 2008년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70% 이상 감소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LG경제연구원의 홍덕표 수석연구위원은 "이같은 양상이 역설적으로 한국 기업들에 새로운 성장,또 다른 도약의 계기를 제공하게 될 것"이라며 "다가올 호황기에 대비해 선제적 투자를 하는 것도 유력한 미래 전략"이라고 지적한다. 실제 불황기에는 작은 투자로도 높은 효율을 확보할 수 있는 소프트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경쟁사들이 원가 절감과 같은 긴축경영에 나서는 때일수록 더욱 용이하다.

언제 어디서든 길은 뚫리는 법이다. 어려운 때일수록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새해 벽두,새로운 10년을 맞이하기 위한 승부가 시작되고 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