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일씨는 나이 스물여섯에도 소년티가 났다. 하얀 얼굴에 숫기 어린 미소."뭘 좋아하냐"고 물어도 수줍음이 많아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할 때가 많았다.

이번 희망등반대 최연소자인 박씨의 키는 168㎝.하지만 몸무게가 52㎏밖에 나가질 않아 20㎏ 남짓한 배낭을 어찌 메고 올라갈까 하는 걱정을 샀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박씨는 등반 내내 선두를 유지하는 '젊은 체력'을 과시했다.

첫날인 16일 오전 11시.성삼재 휴게소를 떠나면서 선크림을 내밀었다. "흰 얼굴이 볕에 그을리면 어쩌냐"는 농담을 하며 장난삼아 얼굴에 크림을 찍어발랐다. 등산길에 박씨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아버지는 늘 집에 있지 않았다. 마주치는 일도 적었다. 박씨는 "아버지가 아마도 안 좋은 일을 했던 것 같다"고 했다. (박씨는 등반 이틀째 되던 날 저녁 아버지가 건달이었다고 털어놨다)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살았지만 아버지와 진득이 나눈 대화는 기억에 없다. 어머니가 9살 되던 해에 집을 나가 봉화에 있는 할머니 손에 자랐다.



중학교 2학년이던 15살 때의 일이었다. 학교 선배에게 흠씬 맞고 집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사내녀석이 왜 맞고 다니냐"며 성을 냈다. 상처를 보듬어주지 않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워 그 길로 학교에 달려갔다. 선배가 있는 교실에 뛰어들어가 의자로 선배를 내리쳤다. 선배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게 보였다. 이틀 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이 소문이 나면서 동네에서는 유명한 '주먹'이 됐다. "안동 경찰서에서 내 이름 모르면 간첩"이 될 정도로 경찰서를 들락거렸다.

고등학교 2학년 때엔 자퇴를 했다. 선생님은 극구 말렸지만 아버지는 잡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학교를 다니기 싫다"고 했더니 단박에 "다니기 싫으면 그만두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버지는 박씨가 22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단 소식에도 내가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 탓이다 싶어 눈물도 안 났다. "아들이라고 걱정해준 것도 없고 너는 너대로 살아가라고 했으니까. 평범하게 자랐으면 조금 덜 비뚤어졌을 텐데…." 박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집을 나와 인천에 올라온 것은 선배들 때문이었다. 처음 두 달은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일을 배웠다. 대포폰이나 대포통장을 사고 팔고,사채를 놓는 일이었다. 형들은 "아무런 해가 없는 일"이라고 했다.

하루에 대포폰을 50~60개씩 팔았다. 그렇게 일년이 지났다. 우연히 집으로 온 대포폰 고지서를 뜯어봤다. 500만원이 넘는 것들이 태반이었다. 이 일로 경찰서도 몇 번씩 다녀왔다. 더이상 못하겠다 싶어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형들이 가로막고 나섰다. 그 때문에 3일을 갇혀 지내며 두들겨 맞아야 했다. 사흘을 앓아누웠지만 외롭단 생각에 아픈 줄도 몰랐다.

상처가 아물고 나선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내일을 여는 집'은 그렇게 발견했다. 박씨는 지난 4월 입소해 내여집이 운영하는 농산물 직거래센터인 도농직거래센터에서 농산물 사진을 올려놓는 일을 한다. 굴곡진 박씨의 인생.세상이 원망스럽진 않을까. 그는 "세상을 원망하기보다 나 자신을 먼저 탓한다"고 했다. 그는 되레 "노력 안 하고 잘 됐다는 사람 없더라"며 웃었다.

대뜸 그가 "나는 행복한 정도로 따지면 '보통'"이라고 말한다. 쉴 곳이 있고 소중한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란다. 단지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본인의 '자신감'이라고도 했다.

그에게 행복의 필요조건을 물었다. 그는 주저없이 '가족'이라고 답했다. 박씨는 내여집에 있는 동갑내기 친구와 그를 길러준 할머니,그리고 내여집 식구들이 인생의 재산목록 1호라고 했다.

박씨는 내여집에서 새 꿈을 키우고 있다. 새해에는 공부도 시작할 요량이다.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마치고 나면 대학진학도 할 계획이다. 박씨는 "나중에 잘되면 예전 친구들도 만날 것"이라며 활짝 웃었다.

지리산=김현예 기자 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