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사업·자산매각·내년계획…하루에도 열두번씩 마음이 바뀐다"

#사례1.국내 '빅4'에 속하는 A그룹은 2010년 해양엑스포 개최도시인 중국 상하이에 75층짜리 고층 빌딩을 짓는 방안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엑스포 신도시에 총 5000억여원을 들여 그룹의 랜드마크를 짓기로 하고 중국 당국과 협의까지 마친 상태에서 경제위기가 불어닥쳤기 때문이다. 건설비용도 최근 위안화 가치의 가파른 상승으로 당초 계획보다 4000억원이 더 많은 9000억원대로 치솟은 상태다. 예정대로 밀어붙이기엔 자금부담이 너무 커졌다. 그렇다고 포기하자니 중국 당국의 눈치가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자칫 밉보였다간 향후 중국내 사업에 차질이 빚어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사례2.자금사정이 썩 좋지 않은 B중견그룹은 계열사나 보유 자산을 팔기 위해 외국계 투자은행들과 활발하게 접촉하고 있다. 물론 원하는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문제는 투자은행들이 원매자를 찾으려면 알짜 계열사까지 묶어서 내놓아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는 점이다. 이 그룹의 총수 C씨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이 바뀐다"며 고통스런 심경을 주변에 토로하고 있다. 비주력 계열사를 헐값에 팔아봐야 고민의 핵심인 자금난 해소에 별 도움이 안된다. 반면 핵심 계열사들을 내놓으면 그동안 추구해왔던 성장 전략을 통째로 접어야 한다.

이 것이냐 저 것이냐,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한 해의 업무를 마무리해야 할 연말이 다가왔지만 현안을 해결하지 못하는 기업들의 시름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박용성 두산 회장은 외환위기 시절 "나에게 쓰레기는 남에게도 쓰레기"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기며 과감하고도 혁신적인 구조조정에 나섰지만,모든 현안들을 일도양단식으로 처리할 수는 없다는 것이 요즘 기업인들의 심각한 딜레마다.

지난해부터 자원 개발을 역점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D사의 사장 E씨는 "지난해까지는 광산 가격이 너무 높아 망설인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가격이 어느 수준까지 떨어질지 몰라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작년의 눈높이로는 투자를 하는 것이 합리적인 의사결정이지만,섣불리 움직이기엔 주변 여건이 너무 불안하다는 것이다. E사장은 "요즘 다른 회사 사장들을 만나봐도 다들 갈대처럼 마음이 흔들린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지구상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을 반도체 회사'라는 삼성전자조차 내년도 반도체 투자계획을 확정짓지 못하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시장에서 들어오는 '사인'이 매일 달라지고 있는 판이라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심적 고통을 가장 많이 겪는 이들은 아무래도 자산 매각에 나선 기업인들이다. 단기간에 필요한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알토란 같은 자산을 내놓았지만 잠재 원매자들이 부르는 가격은 절반 이하인 경우가 태반이다. 그룹 자산(계열사) 매각을 예고한 기업들은 금호아시아나 두산 동부 유진 대한전선 등이다. F기업 사장 G씨는 "만날 때마다 가격을 더 깎으려고 하는 통에 약속을 잡으면 겁부터 난다"며 "그렇다고 협상을 포기하자니 다른 원매자를 찾지 못할까봐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경영자들이 자산 매각을 앞두고 갖고 있는 또 다른 걱정은 향후 경영 실패에 따른 책임 문제다. 시장논리대로 덜컥 절반값에 팔았다가 나중에 자산가격이 다시 상승하면 그 비난을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당시 상황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해봤자 "비싼 월급 받고 그 정도도 예측하지 못했느냐"는 질책만 돌아올 수도 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