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에 밀려올 기업구조조정 파고에 대비해 은행이 선제적으로(pre emptive) 자본을 확충하라."

일시적 자금난을 겪고 있는 우량기업의 회생 지원→부실기업 구조조정→실물경제 경쟁력 강화→금융산업 발전 토대 마련→위기 극복 및 선진국 진입이라는 최선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첫 단추가 은행의 자본확충이라는 얘기다. 첫 단추를 잘못 꿴다면 은행의 자본 부족→우량기업에도 자금투입 회피→부실기업 구조조정 지연→실물경제 경쟁력 악화→금융권 동반부실→한국 경제 좌초라는 최악의 구조로 빠질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우려다.

문제는 은행들이 어느 정도까지 자본을 늘려야 하는가다. 이와 관련,이정조 리스크컨설팅코리아 대표는 한마디로 "은행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수준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는 "은행의 자본적정성 지표인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기준으로 15% 전후까지 검토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시중은행들은 지난 9월 중순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보호를 신청한 이후 후순위채 발행 등을 통해 상당 규모 자본을 확충해 왔다. 이를 통해 BIS비율을 꽤 높인 게 사실이다. 국민은행의 경우 지난달 1조5000억원 규모의 후순위채를 팔아 BIS비율을 9.76%에서 10.74%로 높였다. 신한은행도 7500억원의 후순위채 발행을 통해 BIS비율을 11.90%에서 12.40%로 끌어올렸다. 우리 하나 외환 기업은행 등도 후순위채 발행을 통해 10%대 초중반 수준의 BIS비율을 10%대 후반∼11%대 초반으로 높였다. 글로벌 스탠더드로 12% 이상이면 우량은행으로 평가받고 미국 유럽 등의 우량은행도 10∼11%수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정도에도 후한 점수를 줄 수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에 만족해선 안 된다고 은행들에 충고하고 있다. 내년의 대출 부실이나 기업구조조정에 따른 손실처리 등을 감안하면 미리 완충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금융감독원 고위 당국자도 "BIS비율 기준으로 현재보다 3∼4%포인트 높아야 안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내년에 상황이 안 좋아져 BIS비율이 10% 밑으로 떨어지면 국제 신용평가회사들이 국내 은행 신용등급을 줄줄이 떨어뜨릴 가능성이 있으며 예금자들의 인출 사태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BIS비율 제고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금감원은 은행권이 BIS비율을 15% 이상으로 높이려면 앞으로 35조원 이상의 자본을 확충해야 할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11월 말 현재 위험자산이 1200조원 수준이며,위험자산의 변동이 없다는 가정아래 BIS 자기자본비율을 15% 이상으로 맞추려면 자기자본이 180조원 이상이 되어야 한다. 연말까지 은행의 후순위채 발행이 모두 마무리되면 자기자본이 146조원 수준이 되는 만큼 대략 35조원 이상의 자본 확충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계산이다. 금감원은 35조원을 조달하는 방법으로 후순위채나 하이브리드채(매년 일정 이자를 주면서 만기가 30년 이상인 채권)를 먼저 추진하되 우선주 발행을 통한 증자 등의 방안도 배제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자본확충의 순서는 은행이 먼저 자체적으로 최대한 추진하되 부족하면 정부가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한 시중은행장은 "현재 정부의 역할은 은행의 자체적인 노력을 지켜보면서 우선주 인수 등 비상계획을 은행권과 함께 짜는 일"이라고 말했다.

은행들은 정부가 지원해 줄 때 과도한 경영개입은 곤란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예를 들어 정부가 은행 우선주를 매입해 줄 때 은행 임원들에게 책임을 묻는다든지 경영 각론까지 각서를 받는다면 오히려 은행들이 정부 지원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은 "글로벌 금융위기 등 외부 요인에 따라 건전성이 악화되는 경우 은행 경영진에 과도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사회적 분위기 형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