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룡,세계와 겨룬 영혼의 승부사 / 브루스 토마스 지음 / 류현 옮김 / 김영사 / 640쪽 / 2만6000원

'무술의 달인'인 이소룡도 어릴 땐 신체적으로 허약했다. 경극배우인 아버지의 미국 순회공연 도중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그는 약한 아이에게 여자 이름을 지어주는 미신에 따라 세봉(작은 봉황)으로 불렸다. 홍콩에서 보낸 유년 시절에도 매우 병약했다.

그런 약골이 쿵푸의 지존으로 대성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그의 평전 <이소룡,세계와 겨룬 영혼의 승부사>는 '주먹'보다 '철학'의 렌즈로 그를 비춘다. 또 '할리우드 최초의 아시아계 월드스타'라는 액션 배우보다 살아있는 인간 이소룡의 진면목을 집중분석한다.

'당산대형'과 '정무문''맹룡과강''사망유희''용쟁호투' 등 다섯 편의 영화만 남기고 서른둘의 짧은 생을 마감한 이소룡.이름처럼 용띠해(경진년,1940년)에 태어나 홍콩에서 자란 그는 아역배우로 23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비교적 넉넉한 집안 덕분에 천주교 신자들의 자녀가 다니는 명문 사립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공부보다는 '뒷골목'에 관심이 많았다. 식민 지배국 영국에 반감을 가져 영국인학교의 백인 아이들과 패싸움으로 일상을 보냈고 결국 퇴학까지 당했다.

'호랑이파'의 '싸움에 환장한 놈'이었던 그는 어느 날 어머니에게 무술을 배우게 해달라고 졸랐다. 그렇게 13세에 엽문 사부에게 영춘권을 배우기 시작한 뒤로 그는 밥 먹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오직 수련에 몰두했다. 입문 동기는 유치했지만 그는 '철학으로서의 무술'을 향해 한 단계씩 성숙해갔다. 절권도를 창시한 뒤에는 이를 기예(art)의 경지로 승화시켰다.

그는 중국인이 아니면 쿵푸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전통을 깨고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쿵푸를 가르쳤고 권투 글러브와 보호 장구를 끼고 수련했으며 실전 대결을 시합에 처음 도입했다. 영화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도 쿵푸를 세계에 알리는 한 방편이었다.

저자는 "이소룡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자신의 무술과 철학이었다"며 "오락거리와 흥미를 넘어 그는 자신을 보러오는 사람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전하고자 했다"라고 썼다. 이소룡의 부인도 이렇게 말했다. "그이는 단지 무술만을 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그것에 철학을 가미하고 싶어 했지요. 그래서 고전 철학을 공부했고 자신만의 철학을 정립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철학과 삶의 방식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