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기업 S사는 원유 수입을 위한 유전스 개설을 A은행에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유전스는 은행이 수입대금을 먼저 지급하겠다는 일종의 약속어음으로 정유사는 통상 3개월 뒤에 이자를 붙여 수입대금을 결제한다. A사 고위 관계자는 "기업 신용도나 영업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은행들이 무책임하게 이럴 수가 있느냐"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중소기업들의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공장 가동에 필요한 원자재는 물론 생산설비 도입조차 차질을 빚고 있다. 한 중소기업 사장은 "지난달에는 경상수지 흑자를 내야 한다며 수입신용장 개설을 막더니 지금은 은행들이 12월 결산 마감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한다"며 "그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은행,매입 외환 한달새 30% 감소

9일 금융업계에 따르면 하나은행은 지난달 초 37억달러(잔액 기준)였던 매입 외환 규모를 이달 초에는 27억달러로 10억달러(27%) 축소했다. 신한은행도 40억달러에서 34억달러로,외환은행은 40억달러에서 35억달러로 각각 줄였다. 국민은행도 21억달러에서 18억달러로,우리은행은 51억달러에서 50억달러로 매입 외환을 축소했다.

이는 은행들이 외화 유동성 관리를 위해 대기업의 거액 수출환어음 및 중소기업이 가져오는 만기 3개월 이상의 수출입어음 매입이나 수출신용장(LC) 개설을 거부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금융당국은 은행들이 수출기업에 유동성을 적기에 공급할 것을 독려하고 있으나 심각한 자금난을 겪고 있는 은행들은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 아예 공개적으로 "외화대출의 경우 신규 취급을 중단했으며 매입 외환도 기간과 금액이 늘어나는 것을 억제하고 있다(B은행,지난달 30일 실적 발표회)"고 밝힐 정도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액수가 크고 만기가 긴 수출환어음은 본점 승인을 거치도록 했다"고 말했다.

설사 수출환어음을 받아주더라도 지불해야 하는 수수료 부담이 커져 기업들은 이중고를 겪고 있다. 수출업체가 환어음 매입 요청과 함께 은행에 지불하는 환가료의 경우 3개월물은 8% 수준으로 지난 5개월간 2~3%포인트나 인상됐다.

전문가들은 "경제의 동맥인 자금줄이 계속 막히면 기업과 가계가 자금난으로 부도 위기에 몰리게 되고 실물경기 침체의 골이 깊어진다"고 우려했다.

◆은행 "발등의 불이 먼저"

은행들은 실물경제의 침체를 막기 위한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우선은 자기 발등의 불부터 끄는 것이 시급하다는 입장이다. 당장 은행 건전성의 바로미터인 3분기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은 한 자릿수로 떨어지기 직전이다.

여기에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에 대비,대손충당금을 추가로 쌓아야 하는 상황에서 자칫 대출 기업의 부도가 이어질 경우 은행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 휩싸여 있다. 은행권 고위 관계자는 "대출이나 자산 운용을 보수적으로 가져갈 수밖에 없다"며 "특히 BIS 비율 하락에 따른 규제를 피하기 위해서는 대출 규모부터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당국도 이 같은 상황을 인식,다양한 방안을 내놓고 있다. 증자와 후순위채 발행을 통한 자본 확충을 허용하고 BIS 비율 하락을 막기 위해 보다 강화된 새 BIS 기준인 바젤Ⅱ의 시행 시기를 2010년 1월로 1년 연기했다. 이에 따라 지주사 전환 과정에서 BIS 비율이 9%대로 떨어진 국민은행은 8000억원 규모의 후순위채를 발행할 계획이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정부가 은행의 외화채무에 대해 지급보증을 선 마당에 은행들이 수출입 기업에 대한 자금줄을 끊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실물 경제의 침체도 막고 은행들의 건전성도 유지할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대안을 강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심기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