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는 조직 지는 조직‥(11) 선택의 비밀] 그들의 무모한 배짱뒤엔 믿고 찾는 고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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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 서현동 분당우체국 옆에 자리잡고 있는 현대오일뱅크 신도시 주유소.다른 주유소 같으면 손님이 뜸한 오후 4시에도 주유소 안은 줄지어 늘어선 차량들로 빼곡하다. 10여개의 주유 계량기가 서로 경쟁하듯 쉴새 없이 돌아간다. 한대가 빠지면 또 한대,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주유소로 진입한다.
영화 주유소습격사건의 실제 촬영지로도 유명한 이곳은 업계에선 일명 '신비한' 주유소로 통하는 곳이다. 8차선 대로(大路)에서 100m가량 안쪽으로 들어와 있는 위치는 주유소로서 최대 결격 사유다. 그럼에도 다른 주유소처럼 경품 공세를 퍼붓기는 커녕 ℓ당 100원 이상이나 더 비싸게 기름을 파는 배짱은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다. 사람들이 다니는 인도 위에 나있는 주유소 진입로는 차라리 철저한 고객 무시에 가깝다.
하지만 이 주유소는 전국 현대오일뱅크의 2300개 주유소 가운데 5년 연속 순익 기준으로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3㎞ 반경에 있는 3개의 경쟁 주유소와 비교해도 일일 고객 수가 가장 많다. 이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기 위해 주유소 건물을 한바퀴 끼고 도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하루 750여명의 고객들.이 신비한 주유소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있을까. 어떤 비밀이 고객들로 하여금 이 주유소를 일부러 찾아오게 만드는 것일까.
# 고객 마음을 훔쳐라
"며칠 전에 가득 넣으시더니 오늘도 어디 멀리 가시나봐요"(손님)
"아이 참,이 주유소에선 뭘 숨길 수가 없다니까"(직원)
신비한 주유소에선 주유소 직원들과 고객들이 나누는 대화 내용부터 다르다. '고객과 사귀어라'라는 다소 발칙한 문구가 바로 서비스 모토다.
고객과의 접점을 마음과 마음에서 찾는 이 주유소의 가장 큰 장점은 편안함이다. 나와 내 차량을 알아봐주는 주유소 직원들.가식적인 친절함이 아닌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듯한 한마디 한마디는 나를 위한 전용 주유소에 와있는 듯한 착각까지 들게 한다. 문영호 소장은 "고객들이 자신의 아이 용변이 묻은 기저귀를 아무 거리낌없이 버려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가족적인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며 "경품 공세 등 물적 서비스보다는 고객이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올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고 강조했다.
처음엔 쭈뼛쭈볏 고객에게 말 한마디 못 건네던 초보 주유원들도 한달만 지나면 옆에서 듣는 사람이 얼굴을 붉힐 정도로 애교 섞인 발언을 쏟아낸다는 게 문 소장의 설명이다. 단골 고객인 인근 주민 강정화씨(54)는 "다른 주유소라도 들를라치면 여기서 일하는 단비(아르바이트생) 얼굴이 자꾸 떠올라 결국 여기까지 와서 기름을 넣는다"며 "주유소에 머무는 3분 정도가 하루 전체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말했다.
#조직내 이기심을 지워라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얼치기 건달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잔머리 사장과 융통성 없는 고지식한 아르바이트생 주유원들은 이 신비한 주유소에서 찾아볼 수 없다. 자기 일,남의 일 상관없이 일을 찾아 움직이는 빠릿빠릿한 23명의 직원들만 있을 뿐이다. 그것도 정규 직원이 아닌 아르바이트생들이 대부분이다.
하루 24시간 3교대로 움직이는 직원들은 한시라도 의자에 앉아있을 틈이 없다. 기름을 넣으려는 차들이 한꺼번에 몰리면 세차 파트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들이 주유 파트로 모두 옮겨와 일하고,기름 넣는 차량이 없으면 주유 파트 직원들이 세차일을 함께 돕는다. 일을 많이 한다고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니다. 아르바이트생 시급 4000원은 다른 주유소와 비슷한 수준이다.
물론 처음부터 이같은 업무시스템이 구축된 건 아니다. 자기가 맡은 업무 분야만 별탈없이 돌아가면 된다는 이기심은 이 작은 조직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하지만 소장과 고참 직원들이 먼저 세차와 주유 업무를 번갈아가며 쉴새없이 일하는 모범을 보이자 다른 직원들도 하나 둘씩 움직이기 시작했고 지금은 이같은 방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주유 작업반장을 맡고 있는 배수일씨(55)는 "누가 먼저라고도 할 것 없이 직원들이 경쟁하듯 자신의 일을 찾아 움직인다"며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알고 찾아오는 고객들에게 불편함을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책임의식 같은 것이 작용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자율의 생기를 불어넣어라
"차량이 한꺼번에 몰릴 때는 카운터 쪽부터 차를 차례로 대는 게 어떨까요. ","세차하고 차량 표면의 물기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 에어건을 사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신비한 주유소에선 일주일에 한번씩 팀별로 회의가 열린다. 말 그대로 개인 신변 얘기부터 시작해 업무 건의사항까지 허심탄회한 이야기가 오간다. 55살 작업반장부터 17살 고등학생인 진철이까지 모두 참여해 자유롭게 의견 개진에 나선다. 회의에서 나온 다양한 아이디어들은 실제 업무 현장에 그대로 적용되기도 한다. 상품교환 쿠폰,음료쿠폰,세차쿠폰 등 5개로 복잡하게 나뉘어져 있던 쿠폰을 하나로 통합한 것도 바로 이 회의에서 나온 아이디어 중 하나다.
문 소장은 "팀별 자율 회의에서 나온 아이디어는 비단 이곳 주유소뿐만 아니라 전국 현대오일뱅크 주유소들로 파급되고 있다"며 "외부의 지시나 강요가 아닌 현장을 아는 직원들이 내놓은 아이디어들인만큼 주유소 업무 환경 개선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일하기 즐거운 조직을 만들어라
통상 주유소 아르바이트생들의 근무기간은 6개월 안팎이 보통이지만 이 주유소에선 평균 2년이 넘는다. 고등학교때부터 시작해 4년 넘게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들도 있다. 직원들마다 개인적인 사정은 모두 제각각이지만 공통점은 자신의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주유소에서 2년 넘게 일을 하고 있는 이진원씨(22)는 "돈을 많이 받지는 못하지만 손님이 많은 직장에서 일하는 자체가 즐겁다"며 "나를 알아보고 찾아오는 고객들이 하나둘씩 늘어가는 것도 보람있는 일"이라고 전했다.
주유소 직원들이 즐겁게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자녀의 사회성을 키워주기 위해 일부러 자녀들에게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시키는 단골 손님도 있을 정도다. 엄마 손에 이끌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고등학생은 취재팀과 근무 시간이 맞지않아 만나보지 못했다.
이곳에서 3년째 일을 하고 있는 김다희(22)씨는 "우리 직원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고 주유소 아르바이트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손님들이 많다"며 "나중에 다른 직장에서 일을 하더라도 이곳에서 서로 협력하며 일을 배웠던 경험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호 기자/김병언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