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10년 전이다. 환란으로 온 나라가 휘청거리던 때였다. 길을 가나, 기업을 가나 만나는 사람마다 울상이었다. 그런데 모처럼 환하게 웃는 한 명 만나게 되었다. 어떤 좋은 일이 있을까? 내 마음을 알았는지 그 분은 얼마 전 겪은 이야기를 술술 털어 놓았다.

제법 큰 중견기업 사장으로서 그가 몇 달째 하는 일은 제품개발이나 수출계약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이 은행, 저 은행을 들락거리며 돈 꾸는 일이었다. 부도를 막기 위해 하루하루 피가 말랐다. 금융기관에서는 돈이 말라 확실한 담보가 없으면 대출이란 말을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청춘을 바치고 수십 년간 피땀으로 일군 회사가 태풍 앞에 놓인 촛불 신세가 되다니. 자기 자신이 처량했지만 무엇보다 수백 명의 종업원들의 얼굴과 사랑하는 가족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게 바로 절망의 벼랑 끝에 선 기분이구나하며 하염없이 한강다리를 건너 도착한 곳이 금융기관이 모여 있는 명동거리였다.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마지막 애원해서 통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포기하자는 심정이었다. 은행을 향해 터덜터덜 걷고 있는 데, 어디선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두리번거려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다시 가려는 데 발 끝에 무언가 툭 걸렸다.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팔다리가 온전치 못한 행상 한 분이 잡화물건을 실은 낮은 수레를 끌며 엎드려있는 것이 아닌가. 그 분은 해맑은 얼굴로 사장을 올려다보았다. 사장은 밝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행상을 한 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얼른 지갑의 돈을 꺼내 물건을 하나 샀다. “감사합니다.”하며 앉은뱅이 수레를 밀고 발게 멀어져가는 행상의 뒷모습 보면서, 쇠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순간 주변이 눈부시게 밝아졌다. “사지가 멀쩡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조금 전까지 우거지상을 하고 거리를 헤매던 자신이 한 없이 부끄러워졌다. 그 사장의 말에 따르면 그 순간이 바로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한다.사장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얼굴엔 여유로운 미소가 흘렀다. “나는 이미 많은 걸 가지고 있어.”

환한 얼굴로 은행 대출 담당자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당당하게 대출을 신청했다. 은행 직원은 다소 어리둥절해 하면서 사장의 안색을 살피더니 주섬주섬 대출 서류를 꺼내는 게 아닌가. 즉석에서 대출금을 내주더란다. 기적적인 일어난 것이다.

나라에 IMF구제금융이 실시되어 숨통이 트이자 그 회사는 도산을 면할 수 있었다. 그 분은 이렇게 말했다.“그때 대출이 되든 말든 상관없었어요. 저는 이미 삶의 희망을 찾았으니까요.”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옛날에 임금들은 나라에 극심한 기근이 들거나 가뭄이 들면 전국에 어명을 내려, 혹시 감옥에 억울한 죄인이나 억울하게 죽은 자가 이 없는지 살펴보게 하였다. 심지어 무속인들도 역사적으로 억울하게 돌아가신 인물을 모셔놓고 큰 굿으로 마음을 풀게 했다. 옛 선현들의 지혜였다. 이런 행위는 논리적인 관점이나 합리적인 잣대로 보자면 어림도 없는 미신일 수 있다. 하지만 살다보면 세상은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걸 점점 실감하게 된다.

우리의 생각 너머엔 또 다른 마을이 있다. 지식으로 풀 수 없는 지혜의 마을. 비록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 해도, 자신을 감동시킨다면 세상은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하다. 기적은 자기 마음속으로부터 일어난다. 하지만 알고 보면 기적은 없다. 단지 느끼지 못하는 필연만이 있을 뿐이다.(hoo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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