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께서 워낙 유명해 패션 디자이너로 데뷔할 때부터 주변에서 너무 큰 관심을 보여 부담이 컸어요. 어머니 명성을 이어갈 수 있도록 늘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아직 먼 것 같아요. "

지난 22일 서울 무역전시장에서 열린 '2009 봄ㆍ여름 서울 컬렉션'에서 여성미와 동양적 느낌이 물씬 풍기는 란제리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박윤정 디자이너.그와의 인터뷰는 어머니 얘기로부터 시작됐다. 그의 어머니가 바로 패션계 대모인 이신우 디자이너이기 때문.국내에서 드물게 모녀가 20년간 함께 패션 디자이너 길을 걷고 있다.

박씨는 이신우라는 존재가 아직도 '어머니'보다 '선생님'이란 호칭으로 더 익숙하단다. 1991년 '이신우''오리지날리'의 디자인실장으로 일할 때부터 지금껏 어머니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디자이너 이신우와 재작년 작고한 박주천 전 의원(전 한나라당 사무총장)의 딸로 늘 버거운 관심을 받아야 했다. 그의 외모는 부모 얼굴을 절반씩 섞어놓은 듯한 모습이다.

박씨는 "1994년 '뉴웨이브 인 서울' 컬렉션의 첫 무대에서 잔뜩 긴장했는데 선생님(어머니)께서 하나하나 가르쳐주며 '박윤정'이란 이름을 걸고 출발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해 주셨다"고 고마워했다. 어머니 밑에서 배웠어도 디자인 스타일은 정반대다. 이씨가 큼직큼직하고 대범한 디자인을 선보이는 반면 박씨는 섬세하고 여성스러움이 두드러진다.

연간 100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잘나가던 ㈜이신우가 1998년 외환위기 직후 부도가 나면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이신우ㆍ박윤정 모녀는 CJ홈쇼핑 PB브랜드 '피델리아'의 성공으로 패션업계의 화제를 모으고 있다. 디자이너 브랜드가 단독으로 버티기 힘든 패션업계 현실에서 2001년 CJ홈쇼핑과 손잡고 시작한 '피델리아'가 지금껏 1600억원의 누적 매출을 올리며 CJ홈쇼핑의 간판 브랜드로 발돋움했기 때문.홈쇼핑 브랜드는 생명력이 짧다는 선입견을 없애고 장수 브랜드가 된 것.박씨는 "당시만 해도 패션 디자이너들이 홈쇼핑과 손잡는 것을 꺼렸지만 선생님께서 속옷은 최초로 시도하는 참신한 아이템이라고 판단하셨고,지금까지 이어오게 됐다"고 말했다.

다양한 패션 영역 중 란제리를 택한 이유를 물었더니,박씨는 "여자의 몸은 '신이 주신 선물'이고 란제리는 그 선물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라고 재치 있게 답했다. 그래서 패션 디자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20대 초부터 유독 란제리에 애착이 갔고,값비싼 해외 유명 란제리들을 모으는 게 취미였다고 한다.

박씨는 "어쩌면 국내 패션계 최초로 3대를 잇는 브랜드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귀띔했다. 지금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딸이 엄마 일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패션이 '종합예술'을 다루는 분야지만 많은 사람들이 입어주고 대를 이어 오랫동안 브랜드를 이어가는 것이 성공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글=안상미/사진=강은구 기자 sara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