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선스 연극과 코미디극이 판치는 공연계에서 오랜만에 밀도있는 창작극이 나왔다.

서울 정동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연극 '은세계'는 1908년 11월15일 한국 최초의 현대식 극장 원각사 무대에 올랐던 '은세계'가 아니다. 한국 연극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작가 배삼식씨가 쓴 대본을 손진책씨가 연출해 만든 창작극이다.

100년 전 한국 최초의 신연극으로 공연된 '은세계'의 시나리오는 남아있지 않다. 작가 이인직이 강원도 일대에 퍼져있던 '최병도 타령'을 바탕으로 소설 '은세계'를 썼던 것을 감안해 연극의 내용도 이와 비슷할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100년 전에 공연된 '은세계'는 탐관오리에게 억울하게 재산과 목숨을 빼앗긴 강원도 주지 최병도의 이야기다. 이인직이 백성들을 계몽하기 위해 쓴 작품.지금 선보이는 '은세계'는 당시 공연을 만들었던 광대들이 주인공이다. 오히려 이인직이 깨우치고 싶었던 백성들이 중심 인물인 것이다.

작가는 이인직이 소설 '은세계'만 썼을 뿐 시나리오 작업은 하지 않고 일본으로 떠난 것으로 설정한다. 대신 남겨진 광대들이 공연을 만들어간다. 이들이 무대에 올리는 '은세계'도 연습 과정에서 극중극 형식으로 드러난다.

양반과 지식인들이 정치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광대들은 새로운 신명에 몸을 담근다. 이들은 스토리의 정치성에 상관없이 복잡한 시국에서 놀이판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주제는 묵직하지만 이야기 전개는 배꼽을 잡게 한다. 광대들의 연습 장면은 실제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 주요 배역을 사이에 둔 배우들 간의 갈등,원로 배우의 짜증,그 와중에 연습을 이끌려는 리더의 모습이 실감난다. 배우들이 관객의 존재를 잊은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의 또다른 축인 이인직과 그가 버린 조강지처의 대화가 오히려 묻힐 정도다. 특히 금파 역의 김성예와 김창환 역의 왕기석은 흠잡을 데 없는 연기를 펼쳤다. 소향 역의 한혜수도 능청스럽다.

공연의 절반이 판소리로 채워진 것도 별미다. 당시 신연극은 '춘향가''심청가'가 아닌 창작극을 판소리 형식으로 전개했기 때문이다. 판소리를 별로 접해보지 못한 사람도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다. 19일까지.2만~5만원.(02)751-1500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