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재 수입 대금도 못줄판…금리불문 자금조달 이미 오래전

요즘 대기업 외화자금 담당자들은 입이 없다. 외환시장에 달러의 씨가 마르면서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지만 어떤 얘기도 꺼내기 어렵다.

한 관계자는 "외화부채 원리금이나 원자재 구매자금으로 쓸 달러를 확보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기업들이 부지기수지만 속만 끓일 뿐"이라며 "달러 확보가 어렵다고 말하면 곧바로 자금악화설에 휘말릴 수 있고,거꾸로 달러화 운용에 여유가 있다고 말하면 환투기한다고 뭇매맞기 십상 아니냐"고 손사레를 쳤다.

◆원자재 확보 비상

수출보다 수입 비중이 높은 SK에너지 GS칼텍스 삼양사 등은 원자재 구입에 쓸 달러 확보에 초비상이다. 정유사들은 석유류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 전부를 원유 구입자금으로 쓰고 있지만 회사별로 연간 20억달러 정도는 추가로 빌려와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SK에너지 GS칼텍스 등의 자금담당자들은 "달러 거래가 많고 국제신용도가 좋은 데도 달러 구하기가 쉽지 않다"며 "금리 조건을 따지지도 않고 달러를 빌려온 지가 꽤 됐다"고 말했다. 최근엔 금리를 리보(런던은행 간 금리)에 기존보다 두 배나 높은 3.2%포인트를 얹어주겠다고 해도 조달이 쉽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롯데쇼핑은 이달 중순께 런던시장에서 3억달러 규모의 변동금리부 채권을 발행할 계획이지만 금리가 연일 치솟으면서 고민에 빠졌다. 지난달 25일께만 해도 리보에 1.75%포인트를 얹어 연 4.95% 정도면 채권발행이 가능했지만 이후 리보가 3.2%에서 4.3%까지 오르면서 조달금리가 연 6%대까지 치솟은 상황이다. 회사 관계자는 "조달금리는 이달 중순께 리보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어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양사 역시 설탕 의료용구 등의 수출 대금으로 원당과 원맥 등 원자재 수입 대금을 우선 결제하고 있지만 어려움이 크다. 자금담당자는 "환율 변동성이 너무 커 최근엔 부족한 달러를 한꺼번에 구입하는 게 아니라 일부 매입하고 며칠 지나서 다시 사는 분할매수를 통해 결제 부담을 줄이고 있다"며 "예전엔 3개월치 이상을 재고로 가져갔지만 갈수록 원료 수급이 힘들어지는 상황"이라고 소개했다.

PCB회로기판 절연재인 에폭시 수지의 50%를 일본 미국 이탈리아 등에서 수입하고 있는 경기도 안성의 중소기업 A사는 올해만 환차손이 한 해 매출(40억원)의 5%인 2억여원에 달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올해 초 940∼950원대를 기준으로 원자재 수입계약을 대부분 맺었는데,이게 벌써 300원가량이나 폭등해 매월 결제일이 다가오는 게 무서울 지경"이라며 "이렇게 가다간 한 해 수익을 모두 까먹는 것도 모자라 회사 경영 자체가 어렵게 된다"고 하소연했다.

◆수출기업,환투기 매도'억울'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등 수출 대기업들도 달러 확보가 매끄럽지는 않다. 정부와 시중은행들이 수출환어음 매입을 억제하면서 달러 수출대금을 손에 쥐기가 쉽지 않아졌다는 전언이다. 대기업 관계자들은 "은행들이 수출환어음 매입을 지나치게 꺼리면서 외환시장 경색이 더욱 증폭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은행으로 하여금 수출기업 등이 해외 은행에 예치한 수출대금을 국내로 적극 유치할 것을 요구하자 대기업들은 '난데없이 환투기 세력으로 내몰리는 것 아니냐'며 당혹스런 표정이다. 한 관계자는 "수출환어음과 신용장 등 수출금융 방식을 고려할 때 대기업들이 수출자금을 해외은행에 예치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며 "실익도 별로 없이 비자금 은닉 등으로 오해만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연간 300억∼400억달러의 수주대금을 받는 조선업체들도 확보한 달러자금을 대부분 선물환 매도 방식으로 헤지해 원화로 받기 때문에 보유 달러가 충분한 상태는 아니라고 밝혔다.

김수언/송태형/이관우 기자 so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