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여자와 정사를 벌인 남자,패륜의 대가는 동생의 자살로 돌아왔다. 남자는 허겁지겁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오지' 같은 강마을에 숨어버린다. 하지만 도피처에서 남자는 닮은꼴을 만난다. 시아버지에게 겁탈당한 며느리이자 그 때문에 자살한 남편을 둔 과부이기도 한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상을 겪기 시작하죠.어차피 겪는 게 인생이니까… 겪는 것 말고는 별달리 할 게 없죠.겪는 과정은 지X 같지만… 겪고 나서 얻게 되는 건 종교보다 더 성스러워요. "(<노적가리 판타지>)

소설집 <인형의 마을>을 낸 소설가 박상우씨(50)는 "인생에서 가장 값진 가치는 체험에서 나온다"며 "행복인지 불행인지 이분법적 구분에서 벗어나 체험 그 자체,삶을 겪는 주체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고 말한다.

소설집에 수록된 7편 중 표제작 <인형의 마을>은 이런 생각을 잘 뒷받침해주는 작품이다. <인형의 마을>을 이끌어가는 전업작가인 '나'에게는 아주 특별한 역사적 인물이 셋 있다. 이들은 다른 시대를 다른 신분으로 살았지만,동일한 운명을 갖고 있다. 자신의 시구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이 유자광의 모함을 거쳐 '남아이십미득국(未得國)'으로 바뀌면서 반역자의 누명을 쓴 남이 장군,왕비였으나 국민에게는 창녀 취급을 당한 마리 앙투아네트,총이 아니라 칼을 썼기 때문에 이완용 살해에 실패한 이재명.

'나'는 이들의 인생에서 미득국,창녀,칼이라는 부정적 요소를 거세하고 이들의 불완전한 삶을 완전하게 조직해주기로 한다. 완전한 가상 인생을 구현하는 사이트에서 '완전한' 남이 장군,마리 앙투아네트,이재명의 아바타를 만들어낸 '나'는 "당신이 말하는 부정적인 항목인 상처는 인간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영양소인데,상처받지 못하는 인형들이 어떻게 인생을 알 수 있겠는가"라는 공격을 받은 후 크게 깨닫게 된다.

'완전한 세상은 아닐지라도 서로서로 상처를 비비며 어울려 살 수 있는 공간이 나의 내면에 생성된 것 같다는 생각은 확연하게 들었다. '

치가 떨리는 수치스러운 시간은 버리고 환희가 흘러넘치는 행복한 순간만 골라내는 취사선택은 불가능하다. 온갖 요소가 뒤엉켜 삶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잡탕 같은,자세히 보면 모자이크 같은 인생에서 옳고 그름,좋고 나쁨의 구분에 집착하는 건 의미가 없다. 그럴수록 고통과 혼란은 더해지고,삶을 살아가거나 버텨가는 현재의 숭고함은 빛이 바랜다.

또 다른 작품 <융프라우 현상학>에서 언젠가 가보고 싶은 융프라우를 동경하면서 현실의 너저분한 숙부 '똥푸라우'를 경멸하는 '나'가 결국 "아무리 끊어도 끝끝내 끊어지지 않는 인생"을 받아들이게 되듯,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더라도 현재 우리가 머물고 있는 존재의 좌표를 자각해야 한다고 그는 설명한다.

<인형의 마을>은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1990년대 세기말적 증후군을 담은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정치와 세기말 이후를 보여주는 <사랑보다 낯선>에 이은 네 번째 마을 시리즈.박씨는 "이번 작품에서는 디지털 세상에 서 있는 우리의 초상이 아바타화되는 징후를 다루고 싶었다"며 "지금까지의 마을 시리즈가 개인의 눈에 비친 바깥세상을 소재로 했다면,다음에 낼 마지막 마을 시리즈는 바깥세상이 개인 안에 어떻게 응축되었는지를 다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