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주기 맞아《할아버지라는 이름의 바다》출간
유치원에 다니는 손녀에게 할아버지가 물었다. "소풍인데 뭐 사줄까?" 손녀는 대충 생각나는 대로 껌을 아주 많이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손녀를 위해 엄청나게 많은 껌을 들고 소풍 장소에 등장했다. 며느리가 정말 다른 과자는 하나도 안 사오시고 껌만 저렇게 많이 사오셨냐고 묻자,할아버지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손녀들을 지극히 사랑했던 이 할아버지는 <꽃> <꽃을 위한 서시>로 유명한 시인 김춘수다.
시인의 두 손녀 유미(25)·유빈(18)양이 ≪할아버지라는 이름의 바다≫(예담)에서 2004년 작고한 할아버지에 얽힌 추억을 소개했다. '국민시인'이 아닌 '할아버지'의 인간적인 모습이 잘 드러난다.
작가지망생인 이들은 할아버지가 시를 쓸 때 사용하던 몽블랑 만년필을 유미에게 선물하고 값싼 볼펜으로 대신했다는 이야기,머리카락이 없는 인형을 고른 유빈에게 "저 대머리 인형이 뭐가 좋다고 그러는지…"하고 못마땅해하다가 "할아버지도 대머리면서…"라는 반격에 당황해 '아무 소리도 못 들은 척'했다는 사연 등을 풀어놓았다.
시인은 수능시험을 잘 보지 못했다고 울적해하는 손녀를 위해 '시인에서 기자로' 변신,한 시간에 한 번 꼴로 전화해 뉴스를 전달해주는 자상한 할아버지기도 했다. 유미씨는 "시인일 때 할아버지는 냉철하고 차분한 지식인의 모습이었는데,기자일 때의 할아버지는 도무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붕뜬 목소리에 횡설수설이 난무하는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전화를 뚝하고 끊어버리기 일쑤였다"고 털어놨다.
<꽃을 위한 서시>의 마지막 구절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에 대한 이야기도 소개된다. 이 구절에 대해 손녀가 묻자,시인은 "남자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로 신부,그 누구의 신부도 아닌 바로 나의 신부"라며 "그러나 만약 그 신부가 얼굴을 가리우고 보여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안타깝겠는가" 하고 정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