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60년…도전의 순간들] (5) 1973년 첫 쇳물…제철강국 기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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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까지 한국에는 용광로가 없었다. 근대적 산업국가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철소가 필요했지만 엄두를 낼 형편이 아니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가 채 안 되는 나라에서 1억달러에 달하는 대규모 공사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기술도 턱없이 부족했다. 일본 엔지니어들은 해방과 동시에 본국으로 떠나 버렸고 일제시대 지어진 제철소는 모두 삼팔선 너머에 있었다. 제철소를 직접 본 사람조차 찾기 힘들었다.
무모해 보였던 상상은 1968년 포항 영일만 허허벌판에 포항종합제철(포스코의 옛 이름)을 세우면서 조금씩 현실이 되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결심하고 박태준 당시 사장이 하나하나 실행에 옮겼다.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투자비를 마련했고 부족한 기술은 숱한 시행착오를 통해 메워 나갔다.
5년여의 세월이 흐른 1973년 6월9일.드디어 첫 쇳물이 쏟아졌다. 한번 시동이 걸린 한국의 철강산업은 해를 거듭할수록 탄력이 붙었다.
포스코는 광양에 두 번째 제철소를 지으면서 세계 선두권 철강기업으로 도약했고 현대제철 동국제강 등은 전기로(電氣爐)를 통해 꾸준히 역량을 키워 나갔다. 철강업체의 성장은 자동차 가전 중공업 등 국내 주요 산업의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가 채 안 되는 나라에서 1억달러에 달하는 대규모 공사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기술도 턱없이 부족했다. 일본 엔지니어들은 해방과 동시에 본국으로 떠나 버렸고 일제시대 지어진 제철소는 모두 삼팔선 너머에 있었다. 제철소를 직접 본 사람조차 찾기 힘들었다.
무모해 보였던 상상은 1968년 포항 영일만 허허벌판에 포항종합제철(포스코의 옛 이름)을 세우면서 조금씩 현실이 되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결심하고 박태준 당시 사장이 하나하나 실행에 옮겼다.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투자비를 마련했고 부족한 기술은 숱한 시행착오를 통해 메워 나갔다.
5년여의 세월이 흐른 1973년 6월9일.드디어 첫 쇳물이 쏟아졌다. 한번 시동이 걸린 한국의 철강산업은 해를 거듭할수록 탄력이 붙었다.
포스코는 광양에 두 번째 제철소를 지으면서 세계 선두권 철강기업으로 도약했고 현대제철 동국제강 등은 전기로(電氣爐)를 통해 꾸준히 역량을 키워 나갔다. 철강업체의 성장은 자동차 가전 중공업 등 국내 주요 산업의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