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사에서 첫 국산 라디오를 내놓은 뒤 한동안 함흥냉면만 실컷 먹었습니다. 지금도 냉면만 보면 눈이 번쩍 뜨일 정도지요. "

1959년 락희화학 제3판매과장으로 금성사에 파견돼 라디오 수리와 판매를 총괄했던 이헌조 LG전자 고문(77)의 회고다. 금성사는 라디오를 개발한 직후부터 서울 청계천 인근 장사동 일대의 전파사들을 마케팅 대상으로 집중 공략했다. 하루종일 전파사들을 찾아다녔지만 대부분 상인들은 "국산 라디오를 어디다 쓰겠냐"며 손사래를 쳤다.

이런 상황에서 국산 라디오를 군말없이 받아준 곳은 함경도 출신이 운영하던 희망소리사와 금성소리사 두 군데뿐이었다. 이 고문은 "제품 판매 동향을 체크하려고 전파사 사장님들과 같이 지내다보면 점심으로 함흥냉면을 먹기 일쑤였다"고 말했다.

이 고문에 따르면 금성사가 처음 생산한 라디오 'A-501'은 지금 시점에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열악한 상황에서 탄생했다. 1959년 한국은 전력 상태가 좋지 못해 100V 전압을 유지하는 집이 드물었다. 60~70V로 떨어지는 것은 예사였고 50V까지 내려가는 일도 있었다. 방송국 사정도 열악해 서울 외곽 지역으로만 나가도 라디오 전파가 잡히지 않았다.

이 고문은 "첫 라디오는 50V 전압에서도 동작하도록 설계했다"며 "약한 전파를 잡아내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음질을 떨어뜨리고 감도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품질이 뛰어나다고 말하긴 힘들지만 '한국형 제품'이었던 것은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이 고문에게 금성사의 성공 요인을 묻자 "기술자들의 열정이 밑바탕이 됐지만 밀수품 유입을 막아 국산전자제품 판로에 숨통을 트게 한 박정희 정부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성장하긴 힘들었을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 고문은 "최근 미국과의 FTA(자유무역협정)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는데 한참 잘못된 생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1970년대 국내 전자업체들이 미국에 많은 물량을 수출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기업에 낮은 관세를 보장했기 때문"이라며 "당시와 엇비슷한 효과를 누리려면 가능한 한 많은 나라와 FTA를 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고문은 "FTA 활성화로 세계 시장의 문턱이 낮아져야 다양한 분야의 기업들이 1970년대 전자업체들처럼 성장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1989년부터 1996년까지 LG전자의 최고경영자(CEO)로 활동한 이 고문은 김쌍수 전 부회장,남용 부회장 등 후배 경영자들에 대해 "시대마다 CEO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는데 후배들이 이를 제대로 읽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 고문은 "태동기 경영자들은 국내 최초 제품의 개발이,나와 같은 전환기 경영자들은 해외 시장 개척이 지상과제였다"며 "지금의 CEO들은 선진국형 기업문화를 만들고 세계 시장의 표준이 되는 1등 제품을 만드는 데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송형석 기자/사진=김병언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