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정말 어디론가 이민이라도 가고 싶었어요. "

1960~197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의 주역인 오원철 전 대통령 경제2수석 비서관(80)은 초기 경제개발 당시의 심정을 이같이 회고했다. 경제개발을 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마땅히 돈 나올 곳은 없는 답답한 상황이 이어지면서 당시 관가에서는 실제로 이민갈 나라를 고르기 위해 세계 지도를 펴놓고 한숨을 쉬는 관료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

그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61년 5월.당시 '국산자동차' 공장장으로 일하던 그에게 어느날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출두 통지서가 날아왔다. 상공부 화학과장으로 일하라는 명령이었다.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공군 소령으로 전역한 그의 경력이 발탁 배경이었다.

졸지에 공무원이 된 그에게 '화학공업 5개년 계획' 작성이 과제로 떨어졌다. 하지만 모든 것이 막막했다. 공대 화공과를 나온 그는 경제에 관한 전문지식이 없었다. 5개년 계획이란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공장을 짓긴 지어야 하는데 무슨 공장을 지을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던 그는 산업은행 조사월보의 최신호를 가져다 수입일람표를 뒤졌다. "수입액이 많은 품목을 추려내고 보니 우리 국민 3000만명을 먹여 살려야 하는 의식주에 관한 것들이었어요. 우선 이런 공장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더군요. "

그해 8월 초 그는 10여장의 갱지에다 사인펜으로 그려쓴 차트를 들고 서울 명동에 있던 최고회의 회의실에 들어갔다. 해병 소장인 김동하 재정위원장과 영관급 장교,민간 전문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학공업 5개년 계획'에 대한 브리핑을 마쳤다.

위원장이 "어떻소?" 하고 주위 의견을 물었다. 군인들은 아무 말이 없었고 민간인석에서 딱 한 명이 "충분한 사전 검토가 이뤄진 계획이냐"고 물었다. 솔직히 그는 자신이 없었지만 그렇게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렇습니다"라고 답했다. 잠시 후 위원장이 "좋소"라고 'OK 사인'을 냈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핵심 사업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후 그는 대통령 경제2수석 비서관으로 일하던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에게 경제발전의 중심을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건의하는 등 경제개발 계획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 비결에 대해 "임팩트 폴리시(impact policy)와 지도자의 강한 리더십"을 꼽았다. 그가 말한 임팩트 폴리시란 선택과 집중이다. 전략산업을 엄선해 국가가 지원해 적극 육성함으로써 단시간에 모든 공업 수준이 한 단계 상승하고 그 효과가 경제에 파급된다는 것이다. 그는 또 "후진국의 경제개발형 국가원수는 좋은 리더이면서 동시에 강한 리더여야 한다"고 말했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
사진=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