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60년…도전의 순간들] (2)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게 무슨 5개년 계획이야…공장 쇼핑리스트지"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이게 무슨 5개년 계획인가,쇼핑 리스트지…."
1961년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내놓자 미국 국무무 관료들은 코웃음을 쳤다. 한국 정부의 계획은 '어떤 공장을 짓겠다'는 공장 건설 리스트(쇼핑 리스트)에 불과할 뿐 정교한 개발 계획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실패할 게 뻔하다"는 얘기였다.
지금 생각하면 보기좋게 빗나갔지만 한국의 초기 경제개발 계획은 사실 미국 관료들의 지적처럼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5ㆍ16(1961년) 직후 최고회의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을 전격 결정한 뒤 각 정부 부처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짜낸 부문별 개발계획을 경제기획원이 대충 짜깁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1차 5개년 계획의 핵심인 '화학공업 5개년 계획'은 상공부가 산업은행 조사월보에 나오는 수입일람표 중에서 수입금액이 많은 품목(석유제품 비료 시멘트 등)을 추려낸 뒤 관련 공장을 짓겠다는 식으로 작성됐다. 계획 수립 과정에서 사전 검토도 충분히 이뤄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경제개발 계획에 정통한 전문가는커녕 참고할 만한 해외 사례도 없었다. 당시 경제개발 계획은 사회주의의 전유물이었다. 한국 정부 관계자들이 경제개발 계획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 위해 찾아간 일본과 홍콩의 관료들은 "우리는 시장경제 체제라 그런 것이 없다. 소련에 가서 알아보라"고 했을 정도다.
더 심각한 문제는 경제개발 계획을 실행에 옮길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에서 국민들로부터 산업자금을 조달하는 것은 꿈도 꾸기 힘들었다. 외자유치도 마찬가지였다. 군사정부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미국은 무상원조를 받는 국가에 차관을 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일본은 국교가 없는 나라와 차관협정을 맺을 수 없다고 발을 뺐다.
1963년 9월 말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거의 바닥이 났다. 1차 5개년 계획의 핵심 사업인 대한석유공사 울산정유공장을 짓는 데 외화가 없어서 합작사인 미국의 걸프오일에서 건설비를 꿔와야 했을 정도다. 다급해진 정부는 1차 5개년 계획 중 덜 급한 부문을 축소하거나 연기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4년 서독을 방문한 것도 공식적인 이유야 무엇이든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경제개발에 필요한 돈을 빌리기 위한 목적이 컸다. 다행히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의 지원 약속에 힘입어 4000만달러가량의 차관을 빌렸지만 자금난을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차 5개년 계획이 중대한 전환을 하게 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당초 1차 5개년 계획은 수입 대체 산업 위주로 짜였다. 당시 정유공장이나 비료공장 건설이 중요 사업으로 간주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1964년부터는 수출 제일주의가 핵심 과제로 전면에 등장한다. 밖에서 '달러'를 벌어오지 않으면 더 이상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할 수 없다는 절박감이 커진 것이다. 또 농산물이나 광산물 수출만으로는 충분한 돈을 벌 수 없다는 이유로 공업제품 수출을 핵심 목표로 하는 공업입국 전략을 추진한다. 이 과정에서 섬유공업 등 경공업이 수출 주력 품목으로 떠올랐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수출 증대에 힘입어 1차 5개년 계획 기간(1962~1966년) 경제성장률은 당초 목표치(연평균 7.1% 성장)를 웃도는 7.8%를 기록했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은 순간이었다. 이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수출기반 확대(2차),중화학공업화 선언(3차),경제강국 건설과 산업 합리화(4차),국제 일류화(5차),공업 수준 세계화(6차) 등 새로운 전략과 목표를 제시하게 된다.
특히 3차 5개년 계획은 한국의 산업구조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질적인 도약을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석유화학 조선 철강 자동차 전자 등 현재 한국의 주력 수출 품목의 토대가 대부분 이때 닦였다. 때마침 본격화한 새마을운동은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국민들의 의식에 불을 붙였다. 해외 언론에서 '한강의 기적'이란 말이 나온 것도 이 즈음이다. 이태희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개발협력연구실 전문위원은 "2차대전 이후 경제개발에 나선 나라는 많았지만 한국처럼 성공한 나라는 없다"며 "한국은 후진국들이 가장 배우고 싶어하는 나라 중 하나"라고 말했다.
한국이 다른 후진국과 달리 경제개발에 성공한 비결은 뭘까. 한마디로 설명하긴 힘들다. 전문가들은 뚜렷한 전략과 목표의 제시,지도자의 강한 리더십,선택과 집중,온 국민의 경제개발 의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말한다.
물론 경제개발 과정에서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경제개발이란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자원 배분 등 모든 것을 결정하고 기업은 정부가 이끄는 대로 따라야 하는 관치경제가 굳어졌다. 시민과 근로자의 기본권은 종종 무시됐다. 민간의 능력과 역할이 몰라보게 커진 요즘 또다시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하는 것은 '난센스'에 가까울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국가의 역할이 무의미해진 것은 아니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상무는 "지금은 국가가 개발 계획을 짜고 직접적으로 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라며 "하지만 큰 틀에서의 전략과 목표를 제시하고 취약한 부문을 이끄는 역할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
1961년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내놓자 미국 국무무 관료들은 코웃음을 쳤다. 한국 정부의 계획은 '어떤 공장을 짓겠다'는 공장 건설 리스트(쇼핑 리스트)에 불과할 뿐 정교한 개발 계획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실패할 게 뻔하다"는 얘기였다.
지금 생각하면 보기좋게 빗나갔지만 한국의 초기 경제개발 계획은 사실 미국 관료들의 지적처럼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5ㆍ16(1961년) 직후 최고회의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을 전격 결정한 뒤 각 정부 부처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짜낸 부문별 개발계획을 경제기획원이 대충 짜깁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1차 5개년 계획의 핵심인 '화학공업 5개년 계획'은 상공부가 산업은행 조사월보에 나오는 수입일람표 중에서 수입금액이 많은 품목(석유제품 비료 시멘트 등)을 추려낸 뒤 관련 공장을 짓겠다는 식으로 작성됐다. 계획 수립 과정에서 사전 검토도 충분히 이뤄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경제개발 계획에 정통한 전문가는커녕 참고할 만한 해외 사례도 없었다. 당시 경제개발 계획은 사회주의의 전유물이었다. 한국 정부 관계자들이 경제개발 계획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 위해 찾아간 일본과 홍콩의 관료들은 "우리는 시장경제 체제라 그런 것이 없다. 소련에 가서 알아보라"고 했을 정도다.
더 심각한 문제는 경제개발 계획을 실행에 옮길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에서 국민들로부터 산업자금을 조달하는 것은 꿈도 꾸기 힘들었다. 외자유치도 마찬가지였다. 군사정부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미국은 무상원조를 받는 국가에 차관을 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일본은 국교가 없는 나라와 차관협정을 맺을 수 없다고 발을 뺐다.
1963년 9월 말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거의 바닥이 났다. 1차 5개년 계획의 핵심 사업인 대한석유공사 울산정유공장을 짓는 데 외화가 없어서 합작사인 미국의 걸프오일에서 건설비를 꿔와야 했을 정도다. 다급해진 정부는 1차 5개년 계획 중 덜 급한 부문을 축소하거나 연기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4년 서독을 방문한 것도 공식적인 이유야 무엇이든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경제개발에 필요한 돈을 빌리기 위한 목적이 컸다. 다행히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의 지원 약속에 힘입어 4000만달러가량의 차관을 빌렸지만 자금난을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차 5개년 계획이 중대한 전환을 하게 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당초 1차 5개년 계획은 수입 대체 산업 위주로 짜였다. 당시 정유공장이나 비료공장 건설이 중요 사업으로 간주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1964년부터는 수출 제일주의가 핵심 과제로 전면에 등장한다. 밖에서 '달러'를 벌어오지 않으면 더 이상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할 수 없다는 절박감이 커진 것이다. 또 농산물이나 광산물 수출만으로는 충분한 돈을 벌 수 없다는 이유로 공업제품 수출을 핵심 목표로 하는 공업입국 전략을 추진한다. 이 과정에서 섬유공업 등 경공업이 수출 주력 품목으로 떠올랐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수출 증대에 힘입어 1차 5개년 계획 기간(1962~1966년) 경제성장률은 당초 목표치(연평균 7.1% 성장)를 웃도는 7.8%를 기록했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은 순간이었다. 이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수출기반 확대(2차),중화학공업화 선언(3차),경제강국 건설과 산업 합리화(4차),국제 일류화(5차),공업 수준 세계화(6차) 등 새로운 전략과 목표를 제시하게 된다.
특히 3차 5개년 계획은 한국의 산업구조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질적인 도약을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석유화학 조선 철강 자동차 전자 등 현재 한국의 주력 수출 품목의 토대가 대부분 이때 닦였다. 때마침 본격화한 새마을운동은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국민들의 의식에 불을 붙였다. 해외 언론에서 '한강의 기적'이란 말이 나온 것도 이 즈음이다. 이태희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개발협력연구실 전문위원은 "2차대전 이후 경제개발에 나선 나라는 많았지만 한국처럼 성공한 나라는 없다"며 "한국은 후진국들이 가장 배우고 싶어하는 나라 중 하나"라고 말했다.
한국이 다른 후진국과 달리 경제개발에 성공한 비결은 뭘까. 한마디로 설명하긴 힘들다. 전문가들은 뚜렷한 전략과 목표의 제시,지도자의 강한 리더십,선택과 집중,온 국민의 경제개발 의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말한다.
물론 경제개발 과정에서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경제개발이란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자원 배분 등 모든 것을 결정하고 기업은 정부가 이끄는 대로 따라야 하는 관치경제가 굳어졌다. 시민과 근로자의 기본권은 종종 무시됐다. 민간의 능력과 역할이 몰라보게 커진 요즘 또다시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하는 것은 '난센스'에 가까울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국가의 역할이 무의미해진 것은 아니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상무는 "지금은 국가가 개발 계획을 짜고 직접적으로 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라며 "하지만 큰 틀에서의 전략과 목표를 제시하고 취약한 부문을 이끄는 역할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