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제의 성장잠재력 확충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온 기업 투자가 꽁꽁 얼어붙고 있다. 경제의 불확실성이 높아진 게 가장 큰 이유라지만 이명박 정부가 약속한 규제 완화가 지지부진한 것도 그에 못지 않은 배경이다. 돈줄을 쥐고 있는 대기업들이 투자 의욕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기업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는 내수 활성화와 고용 창출을 기대할 수 없다. 정구현 삼성경제연구소장이 최근 한 강연에서 "2년 뒤 찾아올 호황에 대비해야 할 때"라며 '선행 투자'를 강조했지만 20조원이 넘는 기업들의 '뭉칫돈'은 오락가락하는 정부 정책 앞에서 갈 곳을 잃고 표류하고 있는 실정이다.

◆투자 침체 "앞으로가 더 걱정"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설비투자 증가율은 지난해 4분기(9.2%)에 정점을 찍고 올 1분기(-0.9%)에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선 뒤 극심한 투자 침체 양상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5월 설비투자 증가율은 반도체 장비 등 기계류의 투자 감소로 인해 전년 같은 달 대비 -2.5%를 기록해 전달(-1.9%)의 부진이 더 심화됐다.

하지만 '바닥'을 확인하려면 아직 멀었다는 지적이다. 투자의 선행지표 역할을 하는 기계수주액 증가율은 지난 4월 15.4%(전년 동월 대비)였던 게 '고유가 충격'이 본격화한 5월 들어 -1.1%까지 고꾸라졌다. 기계류 수입액 역시 5월 5.7%로 전달(12.3%)까지의 두 자릿수 증가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기업들의 상품 출하 증가세가 감소(4월 8.3%→5월 6.1%)하면서 재고가 점점 불어(12.2%→13.2%)나고 있는 것도 투자를 망설이게 하는 요소다.

투자심리도 차갑기만 하다. 한국은행이 지난 6월 조사해 발표한 기업 경기전망 BSI(기준치 100)는 5월(92) 6월(88) 7월(77)로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이재준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경제의 변동성이 여전해서 얼어붙은 투자심리가 쉽게 풀리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20조원 대기 중인데…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는 투자를 활성화시킬 이렇다 할 노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규제 완화' 약속을 믿고 투자 계획을 세웠던 기업들의 기대감은 '실망'으로 바뀐 지 오래다. 지난 4월 '투자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위한 민.관 합동회의'에서 거론된 재계의 핵심 건의사항들은 '특혜 시비'를 두려워한 나머지 '기업환경개선 추진계획(6월 발표)'에 거의 반영하지 못했다.

현 공장 울타리 안에 확보해 둔 부지를 자연보전 권역이라는 이유로 활용하지 못해 콩밭으로 쓰고 있는 하이닉스반도체나 여주 공장 증축이 안 돼 원판을 만들어 가공 공장(충남 전의)으로 옮기느라 매년 물류비 30억원을 낭비하고 있는 KCC 등은 투자를 일단 미룬 채 정부 눈치만 살피고 있다.

고유가 수혜 차종으로 꼽히는 기아의 소형차 프라이드는 생산 물량이 달려 주문을 다 맞추지 못하고 있지만 공장이 수도권(광명시 소하리)에 터 잡은 '원죄'로 공장 증설은 꿈도 꾸지 못한다.

경기도가 지난 2월 수도권 대기업 181개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수도권 입지 규제로 인한 증설 투자 지체 금액은 20조9292억원(36개사),신설 또는 이전 투자 지체 금액은 7500억원(8개사)에 달했다. 이만한 투자가 집행됐더라면 직접 고용 창출만 2만5000명이 넘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수도권 지방 가릴 때 아니다'

정부는 대선 핵심 공약인 수도권 규제 완화를 지방의 반발에 굴복해 뒤로 미뤘다. "수도권을 묶어 두는 것으로 지방에 반사적 이익을 주는 정책이 국가경쟁력 제고에 도움이 안 된다"는 얘기는 쏙 들어가고 대신 '선(先) 지역 발전,후(後) 수도권 규제 완화'로 원칙이 뒤바뀌었다.

하이닉스 관계자는 "수도권 규제만 완화된다면 연구 시설이 밀집해 있는 이천공장에 증설투자를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며 "하지만 규제완화 여부가 불투명해 현재로선 증설투자를 한다면 중국 우시공장 등에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고 말했다.

김군수 경기개발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수도권에서 기업 투자가 1조원 늘어날 경우 전.후방 연관 효과로 인해 국내총생산(GDP)은 1조8200억원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경제 성장의 단비는 수도권과 지방을 함께 적신다"며 "수도권을 억누른다고 지방 경제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된 만큼 서둘러 규제 완화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통계청은 31일 '6월 및 2분기 산업활동 동향'을 발표할 예정이다. 정부가 투자 관련 지표의 부진에 대해 어떤 분석과 대응 방안을 내놓을지 주목된다.

차기현 기자 kh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