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소설 '다산'의 작가 한승원 "茶山에게 '실사구시'란 백성을 구제하는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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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인터뷰] 소설 '다산'의 작가 한승원 "茶山에게 '실사구시'란 백성을 구제하는 사업"
"여기가 전남 장흥인디 여그까지 올 수 있으면 오소."
소설가 한승원씨(69·사진)는 인터뷰를 청하는 전화에 온화한 사투리로 답했다.
자신이 서울로 갈 수는 없으나 장흥까지 찾아오면 얼마든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대답이다.
장흥까지는 서울에서 차로 꼬박 5시간이 걸렸다.
장흥 읍내에서 길을 물어 18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니 안양면 율산리가 나타났다.
율산 마을에서도 남해안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아담한 언덕에 그는 살고 있었다.
그의 호를 따서 이름 붙인 '해산토굴(海山土窟)'이다.
이곳에서 다산 정약용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소설 ≪다산≫(전 2권·랜덤하우스)을 끝낸 한씨는 곱게 다림질한 한복 차림으로 객(客)을 맞았다.
역사 속의 선비 같은 모습이다.
그는 손수 재배한 차를 대접했다.
13년 전 낙향한 그는 다산의 제자였던 초의선사를 다룬 ≪초의≫(2003년),다산의 형 정약전의 이야기 ≪흑산도 하늘 길≫(2005년),초의의 평생지기였던 김정희의 생을 그린 ≪추사≫(2007년)를 차례로 냈다.
모두 많은 공을 들인 소설들이지만 그는 이 3편의 작품을 '다산'이라는 웅대한 산을 타기 전에 올라야 할 주변의 준봉으로 규정했다. 《다산》에 대한 그의 애정은 그만큼 각별하다. 그에게 다산이 갖는 의미는 뭘까.
"절박해졌을 때 진실한 삶이 찾아 옵니다. 18년간 유배 생활을 하면서 다산이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내 소설은 '다산의 절대 고독과 그 고독을 어떻게 이겨냈을까'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다산은 글을 쓰면서 고독을 이겨냈지요. 나도 스스로를 절대 고독 속에 가둔 뒤 그 감정을 글로 승화시키고 싶습니다. 물론 아내와 노모가 함께 살고 있지만 그들 외에 거의 사람을 만나지 않습니다."
―너무 힘들게 글을 쓰는 것 아닌가요.
"사실 이곳에서 지내는 것이 한승원이라는 작가의 상품가치를 오히려 올려 놓았어요. '자연에 묻혀 지내는 작가'라는 브랜드 덕분에 원고 청탁도 더 많이 들어오거든요. 게다가 어디든 나가지 않을 핑곗거리가 생긴 것도 좋고요. 서울에서 지내면 웬만한 행사엔 갈 수밖에 없는데 멀리 있다 보니 아주 특별한 일 아니면 가지 않아도 됩니다."
―한국경제신문은 17년째 모범이 되는 경영인을 선정,'다산경영인상'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다산이 주창했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구현한 경영인을 뽑아 널리 알리자는 취지이지요.'실사구시'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전적인 의미는 사실에 근거해 진실을 탐구하는 일입니다. 조선 후기 양반들은 성리학과 주자학의 공리공론에 빠져 백성들을 외면했지요. 여기에 신물이 난 홍대용,김정희,정약용 등 실학파들은 학문으로써 진리를 탐구하되 그 바탕이 현실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어요. 또한 말로만 실사구시할 것이 아니라 '사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업'이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들리는데요.
"'사업'은 요즘 생긴 단어가 아니라 주역에서 나왔어요. 주역에서 '우주의 율동 원리에 따라 천하의 인민에게 실행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지요. 성인의 뜻에 따라 인민을 구제하는 일이 사업입니다. 다산은 저술활동 자체가 사업이었어요. 그가 쓴 ≪목민심서≫ ≪흠흠심서≫ ≪경세유표≫ 등이 모두 백성에게 이익을 주자는 것이었지요. 한국 사회에서도 기업인들은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줄 '사업'만 하지 말고 온 백성이 더불어 살 수 있도록 할 의무가 있습니다."
―현 정부는 실용주의 정치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다산의 실사구시와 어떤 관계가 있나요.
"현 정부의 실용주의는 글로벌 시장 속에서의 실용주의입니다. 밥을 벌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자존심,혹은 부정에 둔감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약용은 자기 아들들에게도 '이익을 볼 때는 반드시 그것이 의로움인지 아닌지를 보고 다가가야 한다'고 했어요. 현실적인 결과와 함께 그것을 이뤄내는 과정과 태도도 중요하게 본 것입니다. 현 정부의 실용주의와 정약용의 실사구시는 이런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촛불집회도 실사구시 속에 담겨 있는 '태도의 중요성'과 연결시켜 볼 수 있을까요.
"미국산 쇠고기 문제는 결과만을 중요하게 생각한 정부의 허점에서 시작된 것으로 봅니다. 불리한 것을 미리 알리지 않고 국민들에게 정직하게 대하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거기에 불만을 가진 국민들이 광장 민주주의 형태로 촛불집회를 시작한 것이지요. 정치인들은 이 사태에 대해 거부감만 가질 것이 아니라 이를 받아들이고 이용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만큼 정직한 자세로 대한다면 국민들을 설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오랜 기간 연구한 때문인지 다산과 한 몸이 된 듯합니다.
"사실 다산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의 눈높이를 그에게 맞추려고 무던히 애를 썼어요. 그가 읽었던 책,그에 관한 책 등 200여권의 문헌과 고증자료를 참고했습니다. 그렇게 다산 속으로 내가 들어갔다고 할까요. 하지만 이런 일방적인 방식만으로는 역사서는 쓸 수 있어도 소설은 쓸 수 없어요. 다산 또한 내 속으로 들어와야 하거든요. 그렇게 탄생한 것이 ♥다산♥이라는 소설입니다."
―방대한 작업량을 소화하기 위해 체력 관리를 하시나요.
"사실 낙향한 결정적인 이유가 건강 때문이었어요. 이곳에 내려온 뒤로는 체중도 불고 살빛도 좋아지더군요. 오랜 시간 좋은 차를 마셔온 것도 건강 비법입니다. 2004년에는 뒤란에 있는 600평 대나무 숲을 차밭으로 만들었지요. 고것들이 우리 손주 다음으로 예뻐요. (소설가 한동림과 한강이 그의 아들,딸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요가도 합니다. 무리한 동작은 안하지만 마음을 정결하게 하면서도 혈액순환을 돕는 것 같아요. 늘 앉아서 작업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꼭 필요한 운동입니다."
―다산이 어려운 데 비해 이번에 내놓은 소설은 아주 쉽게 읽힙니다.
"영화의 장면들이 지나가듯이 영상미를 강조했습니다. 실제 700쪽에 달하는 이 소설은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도록 짧은 2~3쪽의 글들을 112개의 제목으로 엮어놨지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소설을 쓰기 위해 읽은 책들이 얼마나 어려웠느냐에 상관 없이 소설은 재미있고 쉬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다음엔 아름답고 슬퍼야 하고요."
―'슬퍼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람은 슬퍼야 세상을 제대로 봅니다. 원래 기쁨은 붉은색,슬픔은 푸른색으로 표현됩니다. 슬플 때 인간은 더 냉정하게 세상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뜻이지요. 다산도 18년간의 유배 생활이 없었으면 그 많은 저술을 내놓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 작품에 등장했던 김정희,정약전 등도 유배 생활을 함으로써 일생 일대의 과업을 달성할 수 있었고요."
―다음 작품도 계획 중이신가요.
"신화와 전설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장편소설을 쓰고 싶어요. 자라투스트라와 같은 인물을 내세운 철학적이고 신화적인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글=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사진=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