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신인류 화끈한 로맨스...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이철 지음│다산초당│332쪽│1만3000원
'경성 시내 한복판으로 전차가 지나가면 축음기 소리통은 '오빠는 풍각쟁이야'를 연주한다.
방금 요릿집에서 나온 남성은 깔끔한 양복 차림에 머리는 포마드 기름을 발라 넘겼다.
그때 양산을 든 신여성이 에나멜 구두소리를 또각또각 내며 그에게 다가온다.
일제 시대 경성에 나타난 신인류,이름하여 모던 걸과 모던 보이였다.'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은 자유 연애론자 앨렌 케이 신봉자들의 이야기다.
여성의 정조는 육체가 아닌 정신에 존재한다는 신정조론을 주장한 시인 김원주,정조의 해방을 외친 화가 나혜석,성적 만족을 위해 정신적 사랑 없는 육체적 결합을 실천했던 여성해방주의자 허정숙의 '파격'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모델소설 논쟁에 희생당한 소설가 김명순의 삶은 한국 근대 문학사와 동행하며 함께 자살한 유부녀 김용주와 이화전문 학생 홍옥임의 동성애에 대해 '이익이 있을지언정 해는 없는 관계'라는 매우 관대한 사회적 인식이 존재했음을 밝힌다.
또 주세죽 등 신여성 트로이카의 만남과 이별은 사선을 넘나드는 긴장감을,혁명가 부부 박진홍과 김태준의 연안행은 낭만적 로맨스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의 말로는 대부분 비참했다.
죽음으로써 맹세를 지킨 사회주의자 장병천과 기생 강명화,죽음의 연애 공식을 실행에 옮긴 청년 의사 노병운과 카페 여급 김봉자,남성 문인들에 의해 탕녀로 낙인 찍혀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김명순에게 사회는 냉담했다.
조선 최고의 여류 성악가이자 연극 배우였던 윤심덕과 목포 부호의 아들이었던 김우진의 사랑도 허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926년 8월4일 새벽 4시께.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던 연락선의 급사는 일등실 3호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가방 위에 '뽀이에게'라고 쓴 편지만 놓여 있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뜯어보니 '대단히 미안하나 이 유언서를 본적지에 부쳐 주시오'라고 씌어진 메모지와 사례를 표시하는 5원짜리 지폐,유서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김홍조 편집위원 kiruki@hankyung.com
'경성 시내 한복판으로 전차가 지나가면 축음기 소리통은 '오빠는 풍각쟁이야'를 연주한다.
방금 요릿집에서 나온 남성은 깔끔한 양복 차림에 머리는 포마드 기름을 발라 넘겼다.
그때 양산을 든 신여성이 에나멜 구두소리를 또각또각 내며 그에게 다가온다.
일제 시대 경성에 나타난 신인류,이름하여 모던 걸과 모던 보이였다.'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은 자유 연애론자 앨렌 케이 신봉자들의 이야기다.
여성의 정조는 육체가 아닌 정신에 존재한다는 신정조론을 주장한 시인 김원주,정조의 해방을 외친 화가 나혜석,성적 만족을 위해 정신적 사랑 없는 육체적 결합을 실천했던 여성해방주의자 허정숙의 '파격'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모델소설 논쟁에 희생당한 소설가 김명순의 삶은 한국 근대 문학사와 동행하며 함께 자살한 유부녀 김용주와 이화전문 학생 홍옥임의 동성애에 대해 '이익이 있을지언정 해는 없는 관계'라는 매우 관대한 사회적 인식이 존재했음을 밝힌다.
또 주세죽 등 신여성 트로이카의 만남과 이별은 사선을 넘나드는 긴장감을,혁명가 부부 박진홍과 김태준의 연안행은 낭만적 로맨스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의 말로는 대부분 비참했다.
죽음으로써 맹세를 지킨 사회주의자 장병천과 기생 강명화,죽음의 연애 공식을 실행에 옮긴 청년 의사 노병운과 카페 여급 김봉자,남성 문인들에 의해 탕녀로 낙인 찍혀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김명순에게 사회는 냉담했다.
조선 최고의 여류 성악가이자 연극 배우였던 윤심덕과 목포 부호의 아들이었던 김우진의 사랑도 허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926년 8월4일 새벽 4시께.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던 연락선의 급사는 일등실 3호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가방 위에 '뽀이에게'라고 쓴 편지만 놓여 있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뜯어보니 '대단히 미안하나 이 유언서를 본적지에 부쳐 주시오'라고 씌어진 메모지와 사례를 표시하는 5원짜리 지폐,유서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김홍조 편집위원 kiru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