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언론이 만나기 힘든 오너 경영인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인터뷰를)꺼린 적은 없다"는 본인 해명에도 불구하고 그가 언론에 등장한 모습을 보기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지난 25일 서울 공항동 대한항공 본사 7층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우직하고 고집스러운' 오너일 것이라는 선입견은 2시간여 인터뷰 동안 여지없이 무너졌다.

해박한 식견과 폭넓은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그룹 경영 현안은 물론 경제상황 전반에 걸쳐 논지가 분명했다.

27개 계열사를 거느린 수송물류 전문그룹 총수로서의 저력을 여지없이 보여줬다.


―최근 메리츠그룹이 제일화재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M&A)을 선언했습니다.

김승연 한화 회장은 제일화재의 '백기사'를 자처하고 나섰는데요.

"(제일화재 M&A에는)전혀 관여할 생각도 없고,관심도 없습니다.

메리츠그룹은 계열 분리가 끝난 별개 회사입니다.

제 철학은 적대적 M&A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난달 ㈜한진 주주총회에서 외아들인 조원태 상무가 한진 등기이사로 선임됐습니다.

경영권 승계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경영권 승계와 관련된 법적 여건들이 수시로 바뀌고 있습니다.

안팎의 변화에 맞춰 (승계 작업을)벌여 나갈 계획입니다.

전문경영인들에게 밀리지 않는 전문지식을 갖춘 오너 경영인으로 키우려면 확실한 경영 수업을 받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삼성이 전략기획실을 해체하기로 했는데,한진그룹도 변화가 있을지요.

"다른 그룹 구조조정실이나 기획조정실과 한진의 구조조정실은 다릅니다.

계열사에 대한 인사나 신규 사업 진행 등에 절대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공정거래법 등과 관련해 그룹 차원에서 대응해야 할 때 계열사별 사례를 모으거나 종합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한 '코디네이터' 역할이 전부입니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의 첫 해외 순방에 동행했는데요.

'기업 프렌들리' 정부 출범으로 기업하기가 편안해졌다고 보십니까.

"이 대통령은 당선 전에도 여러 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기업을 위해 뭔가 하려는 분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대통령께서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는 만큼 재임기간 중 친기업 정책을 지속적으로 펴 나간다면 큰 변화가 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주력 계열사인 대한항공이 내년 창립 40주년을 맞습니다.

혹시 그룹을 좀 더 키우기 위한 복안이 있는지요.


"수송 물류가 한진그룹의 본류입니다.

취약점을 보완하거나 특정 분야의 노하우를 얻기 위한 M&A는 항상 열어두고 있습니다.

다만 덩치 키우기를 위한 M&A는 절대 사절입니다.

재계 몇위냐보다는 질적으로 강한 기업,경쟁력 있는 그룹을 원합니다.

대한항공은 주가나 이미지 측면에서 저평가받고 있다는 게 개인 생각입니다.

내년에는 합당한 평가를 받도록 하자는 게 우선 목표입니다."


―계열사인 에어코리아가 오는 7월 저가 항공기를 처음 띄웁니다.

그동안 명품 항공사 자리매김을 줄곧 주창해 왔는데,저가 항공시장 진출은 어떻게 봐야 하는지요.


"저가 항공사는 차별화 전략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유통업체들이 백화점과 대형 마트(할인점)를 함께 운영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죠.고객들의 다양한 니즈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기업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40년 항공 노하우를 바탕으로 운영할 에어코리아는 고객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기업들이 올해 1분기 실적을 속속 공개하고 있습니다.

고유가로 어려움이 많으실 텐데.

"항공업의 경우 유가가 차지하는 비용이 40% 선입니다.

지금은 이익 창출이 아니라 생존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대한항공도 사정은 비슷합니다만,밑지는 장사는 안한 것 같습니다.

2005년에 도입한 '10-10-10 전략'(비용 10% 절감,매출 10% 증대,생산성 10% 향상)과 국제선 유류할증료 보전,에쓰오일 배당 등이 보탬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이 오히려 기회일 수 있습니다."


―'역발상' 얘기인가요.

"외환위기 상황 때 대한항공은 항공기 112대(임차 14대 포함) 중 일부를 매각한 뒤 임차하는 세일&리스백으로 유동성 위기를 넘겼습니다.

2001년 9·11 테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나이티드항공 등 미국 항공사들이 파산 위기로 몰리면서 보잉,에어버스 등 항공기 제작사들도 경영난에 봉착했죠.하지만 이때를 항공기 도입 호기로 판단했습니다.

초대형 차세대 항공기인 A380과 B787을 각각 8대와 10대 매입했습니다."


―다른 항공사는 왜 그렇게 못했나요.

"당시 그런 생각을 가진 전문가들은 많았습니다.

항공업에 수십년 종사한 사람이라면 '감(感)'이라는 게 있죠.미국에서는 단기 수익에 급급한 전문경영인 체제가 장기 투자를 가로막는 요인이었을 것입니다.

오너 경영 체제의 장점이 위기상황에 빛을 발했다고 할까요.

35년간 항공업에 몸담아온 저로서는 미래의 항공 수요와 항공기 시장 판도 등을 분석한 뒤 과감한 결정을 한 거죠.상황 판단을 그렇게 했더라도 오너가 아니었으면 쉽지 않았겠죠."


―특별한 경영철학이 있으신지요.

"'쇼(show)'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 회장은 서너 차례나 쇼를 싫어한다고 언급했다.) 당장은 효과가 없더라도 결국엔 '한우물을 판' 기업들이 가치를 인정받겠지요.

기업사를 되짚어봐도 그렇고요."


―구상 중인 신규 사업이 있다면.

"물류 분야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무작정 벌이는 것은 정말 싫습니다. 쇼는 질색입니다.

스위스에어가 망한 뒤 한 중역을 만났더니 '너무 벌이다 망했다'고 하더군요.

선대 회장께선 '모르는 분야는 거들떠보지도 말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알려진 대로 브라질(상파울루)과 남아프리카공화국(요하네스버그) 노선은 조만간 비행기를 투입합니다.

중남미 노선은 앞으로 더욱 늘려야 하는 핵심 노선입니다."


―한진해운 경영권과 관련해서는 어떤 구상을 갖고 계십니까.

결국 한진그룹이 인수·합병하지 않겠느냐는 관측들이 나오고 있는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3세들이 독자 경영을 할 수 있는 정도로 성장했다고 판단되면 흔쾌히 계열분리해 줄 것입니다.

현재는 한진해운 이사로서 최은영 회장(고 조수호 회장의 미망인)에게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고 있죠."


―최근 문화사업에 관심을 갖는 기업들이 많습니다.

"문화사업을 포함해서 기업의 사회공헌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168만유로를 지원해 한국어 안내 서비스를 제공토록 한 것이나 미국 남가주대 한국학연구소를 돕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앞으로 글로벌 문화 마케팅을 더욱 확대할 계획입니다."

글=김동민 기자/사진=강은구 기자 gmkdm@hankyung.com

조양호 회장 약력

△1949년 인천 출생
△1964년 경복고등학교 입학
△1968년 미국 쿠싱아카데미 고교 졸업
△1974년 대한항공 입사
△1975년 인하대 공대 공업경영학과 졸업
△1979년 미국 남가주대 경영대학원 석사
△1992년 대한항공 사장
△1996년 (現)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2003년 (現) 한진그룹 회장
△2004년 프랑스 레종도뇌르-코망되르 훈장 수훈
△2005년 몽골 북극성훈장 수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