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빠진 정욱준의 옷을 나는 홈쇼핑에서 처음 만났다.

네이비 컬러의 수트를 입는 순간,'아, 진짜 여자를 잘 아는 디자이너구나' 하고 생각했다.

평균 162㎝ 정도 키에 길지 않은 다리를 가진 한국 여성들의 체형에 꼭 맞으면서 늘씬해 보이게 하는 정장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하지만 아쉽게도 디자이너 정욱준의 크리에이티브한 여성복은 만나볼 수 없다.

그의 옷은 홈쇼핑을 제외하곤 모두 남성복이기 때문이다.

올초 프랑스 파리 컬렉션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디자이너'로 현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정욱준이 지난 8일 서울 청담동에서 '엑소핏바이준지(Ex-O-Fit by JUUN. J)' 패션쇼를 열었다.

봄 햇살 비치는 어느 오후,가로수길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자랑스런 디자이너'나 '한국 패션의 향방'과 같은 거창한 내용이 아니라 동양인에 신인 남성복 디자이너라는 그리 유리하지 않은 조건에도 불구,'가장 입고 싶은 옷'으로 해외 바이어와 프레스를 달뜨게 만든 비결이 궁금했다.



"너 같으면 입겠니?"


정욱준은 옷을 디자인한 후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의 정답엔 타협이 없다.

스스로 내린 '예스'는 늘 대박을 터뜨린다.

'해체와 결합'이라는 형이상학적 디자인 컨셉트를 가지고 있지만,그는 컬렉션이라도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그니처 아이템은 트렌치 코트다.

한쪽 소매가 없거나 트렌치 코트를 하체 쪽에 배치하거나 파커와 결합을 시도하기도 한다.

트렌치는 가장 일상적인 옷이지만,변화를 불어넣는 사람은 없었다.

"옷은 발명품이 아니에요.

어느 한 가지 아이템에 제대로 변형을 주는 게 중요하죠." 다소 실험적이지만 '입고 싶은 옷''팔릴 수 있는 옷'으로 평가받았다.

누보-클래시시즘,일상적이고 기본적인 아이템을 새로운 패턴이나 형태의 옷으로 보여줌으로써 정욱준의 옷들은 한국의 분더숍(편집매장)을 비롯 밀라노의 단토네,홍콩의 조이스,파리의 레클레어,뉴욕의 아틀리에,영국의 벨티스 등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다.

정욱준이 사랑받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정확한 실루엣이다.

이는 수트를 입었을 때 가장 잘 알 수 있다.

수트의 생명은 '슬림 핏(fit)'과 '편안함'이다.

옷의 패턴과 소재를 얼마나 잘 선별하느냐에 따라 이 두 가지가 결정된다.


1980년대 스타일이 뜨고 있어요

정욱준의 트렌치 사랑은 2008 F/W 파리 컬렉션 피날레에서 입은 자신의 트렌치 코트에서도 잘 보여진다.

15년 전 영국의 빈티지 시장에서 산 베이지 컬러의 심플한 트렌치 코트는 블랙 진에 엑소핏 운동화를 신은 정욱준을 어느 누구보다 더 멋지게 만들어준 일등공신.지난 8일 열린 패션쇼는 리복과의 콜라보레이션의 일환으로 파리컬렉션에서도 선보였던 엑소핏과 함께 했다.

"80년대 조다쉬 단꼬바지와 발목 위로 올라오는 운동화 기억나시죠? 최근 80년대 트렌드가 가장 핫하고,그 당시 가장 핫했던 브랜드가 리복인 만큼 트렌드를 다시 재조명한 거죠." 엑소핏을 신을 땐 하의는 스키니하거나 와이드하게,상의는 반대로 오버사이즈로 크게 입거나 피트되게 입어야 된다.


아래 위 한벌로 짝 빼입는 건 촌스러워요

그렇다면 남자들의 스타일을 위한 '머스트 해브' 아이템은? 정욱준은 심플한 티셔츠에 블랙진,스니커즈와 트렌치 코트의 매치,또는 블랙 재킷과 진을 추천한다.

잘 재단된 원버튼 블랙 재킷 하나면 다양한 멀티 코디가 가능하다.

세련된 캐주얼 룩은 상의에 포인트를 줘야 한다.

청바지에 금속 체인 벨트를 늘어뜨리거나 화려한 구두를 신기보다 안경이나 가방,모자 정도로 포인트를 주는 게 세련돼 보인다.

또한 정장 수트를 제외하곤 상·하의는 서로 다른 브랜드,다른 아이템과 섞어 입어야 한다.

위,아래 한벌로 빼입는 건 촌스러운 스타일로 가는 지름길.절대 한 가지 브랜드로 통일하지 않도록 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의 옷장엔 트렌치 두 벌,재킷 두 벌,청바지 네 벌밖에 없다고 한다.

다른 디자이너의 옷을 입지 않기 때문. "너무 멋내는 디자이너는 바람직하지 않거든요."

매번 화려한 의상으로 피날레를 장식하는 빅터앤 롤프보다 수십년째 심플한 티셔츠와 진을 입은 모습의 아르마니가 더 프로페셔널해 보이는 것처럼.

아직도 소년 같은 외모의 디자이너는 가야 할 길이 멀다며 그 흔한 파티나 행사,방송 등엔 등을 돌린다.

목 늘어난 티셔츠에 트렌치 하나 걸쳐도 멋스러운 프랑스 배우 샤를로트 갱스브르처럼 내추럴 룩이 가장 스타일리시하다는 그는,오늘도 조용히 작업실에서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고 싶어할까'를 고민한다.

스타일 칼럼니스트·브레인파이 대표 www.cyworld.com/venus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