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몸에 새겨진 배냇상처도 보았다.
"형,그 흉터,태중의 기억입니다.
지금 몸을 두고 공전하고 있는 중이네요."
"맞아,나도 이 놈의 수술자국이 꼭 지네 같아." 옆에서 다른 시인들도 껴들었다.
문씨는 그때 "다들 그거,시쓰세요. 한 달 이내로 안 쓰면 내가 다 쓸테니까"했다.
그리고 얼마 뒤 '현대문학' 9월호에 '지네-서정춘전(傳)'이라는 시가 실렸다.
'나는 태중에서부터 늑골 아래가 아파 몹시 울었다. 세상에 툭,떨어지자/ 냅다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잠시도 그치지 않고/ (중략)// 난 지 삼칠일 만에 늑막염 수술을 받았다/ 난 지 두 돌 만에 어머니가 죽었다….'
문씨의 시를 보고 서정춘 시인의 입이 함지박만해졌다.
"참 재미있어.재미있고 말고.과거 선배 문인들끼리는 시를 빌려주거나 꿔오는 품앗이까지 있었다는 농반 진반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어.그걸 생각하면 내 인생사를 빌려쓴 것 쯤은 아무 것도 아니지."
그해 현대문학상 최종 후보까지 오른 이 시가 이번에 나온 문씨의 새 시집 '배꼽'(창비)에 실려 있다.
제목이 '서정춘'인 시도 있다.
'그가 참 웅크리고 운다./ 말똥냄새 파고드는 것처럼 웅크리고/ 울다가,마부 아버지 염해드리는 것처럼/ 꽁꽁 안아들이는 것처럼….'
나이 마흔에 늦깎이로 등단한 문씨는 까마득한 선배 시인의 삶에서 '극약 같은 짤막한 시'만 쓰는 '죽편'의 이미지와 주걱뼈 한뼘 아래의 '지네' 같은 흉터를 함께 읽어낸다.
대학을 중퇴하고 지방에서 늘그막에 온힘으로 시를 쓰고 있는 그의 내공은 이처럼 삶의 근본과 상처로부터 뜨겁게 달구어진 '화로' 같다.
이번 시집의 표제작 '배꼽'에서 그가 노래한 것도 마찬가지.그는 '외곽지 야산 버려진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한다. / 전에 없던 길 한가닥이 무슨 탯줄처럼/ 꿈틀꿈틀 길게 뽑혀나온다'고 첫연을 시작한 뒤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라는 절창을 돋워낸다. 산중의 폐가에서 생명과 활력을 뽑아내는 그의 몸짓.지난 시절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였지만 그는 낡은 풍경화의 한 자락에서 파릇한 탯줄의 향기를 피워올린다. 지난해 미당문학상을 받은 시 '식당의자' 또한 유원지 천막 앞에서 몇날 며칠 비에 젖는 플라스틱 의자의 쓸쓸하면서도 당당한 휴식을 다룬 수작이다. 특히 '저기 잘 내려 앉은 의자,/ 젖어도 젖을 일 없는 전문가다. 의자가 쉬고 있다'는 마지막 구절에서 '속을 다 파낸' 그의 시적 자세가 더욱 빛난다.
그래서 그는 '두 눈이 아니라 온몸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의 그릇을 빚는 사람'(김양헌),'다른 말이 필요없다.
꿈틀거리며 질펀하게 번지는 절창 시편들을 직접 만나면 될 것이다'(황동규)라는 극찬을 듣는다.
그 비결 중의 하나는 스스로 밝혔듯이 인간이 없는 풍경은 절경이 아니라는 믿음이다.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 / 사람의 냄새가 배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 사람이야말로 절경이다.'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