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정보기술(IT) 전시회로 꼽혀온 세빗(CeBIT)이 주요 기업들의 외면으로 명성을 잃을 위기에 몰렸다.4일(현지시간) 독일 하노버에서 개막한 세빗 전시회에서는 소니,LG전자,모토로라,구글 등 세계적인 IT 기업들의 첨단제품을 찾아볼 수 없다.이들 글로벌 기업은 작년부터 세빗에 등을 돌렸다.

세빗에 참석한 국내 대기업은 삼성전자가 유일하다.지난해 2개 부스(915평)를 열었던 삼성전자는 올해 부스 규모를 1개 부스(679평)로 줄였고 내년에는 불참도 심각하게 검토 중이다.

◆참가기업 수 매년 뒷걸음


세계 IT 전시회 중 드물게 컴퓨터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통신 등 IT 전 분야를 아우르는 전시회로 각광받던 세빗 전시회가 한때 인기를 구가하다 문을 닫고만 미국 '컴덱스 쇼'의 전철을 따라가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세계 IT 전시회가 세빗을 제외한 CES(북미소비자가전전시회),MWC(모바일 월드 콩그레스),IFA(국제전자전시회) 등 3대 전시회로 재편되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겉으로 보기엔 세빗은 아직 건재하다.지난 1월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나 스페인 바로셀로나에서 개최된 MWC 전시회에 비해 참여기업 수나 관람객 수에서 월등히 앞선다.올해 세빗 참가기업은 5845개사에 이른다.관람객 수는 40만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런데도 세빗은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다.참여회사 수가 해마다 뒷걸음치고 있기 때문이다.2002년 7200개였으나 올해는 5800개로 줄었다.이 여파로 전시기간도 하루 짧아졌다.

이에 대해 주최 측은 "달러 약세로 주요 IT 기업들이 비용 압박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MWC에 신상품 전시 뺏겨

세빗의 위상이 흔들리는 가장 큰 이유로 애매한 개최 시기가 꼽힌다.매년 1월과 2월에 개막하는 CES와 MWC에서 기업들이 신기술과 전략 상품을 먼저 소개해 버리는 탓이다.

그러다 보니 세빗은 CES와 MWC의 재탕이라는 지적을 받는다.게다가 매년 8월 말께 열리는 IFA에서는 하반기 시장을 겨냥한 제품을 내놓을 기회다.글로벌 기업들이 IFA로 옮아가는 이유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CES는 가전,MWC는 통신,세빗은 IT산업 전반을 아우르는 종합 IT전시회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컨버전스' 바람으로 이들의 영역이 허물어지면서 시기적으로 뒤에 개최되는 세빗이 차별화할 수 있는 여지가 좁아져 버렸다는 평가다.

급변하는 IT 흐름을 주도하지 못한다는 불만이 세빗의 쇠락을 가져왔다는 지적이다.한때 세계 최고 권위의 전시회로 불렸던 컴덱스쇼도 마찬가지였다.

1979년부터 세계 컴퓨터산업을 주도하고 발전시켰던 컴덱스쇼는 IT산업의 변화 물결을 따라잡지 못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국내 벤처기업 관계자는 "세빗 전시회가 주목을 끌지 못하는 것은 CES 등의 전시회에 비해 전시제품도 차별화되지 못했고 새로운 IT 흐름을 선점하는 데도 실패한 탓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박영태 기자 py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