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은 꿈을 먹고 자란다'는 증시 격언이 있다.주가는 분명 미래가치를 반영하고 있다는 얘기다.애널리스트들은 주가지수나 목표가를 예측하는 보고서를 하루에도 수십건씩 쏟아낸다.투자자도 향후 실적이 나아질 기업에 열광한다.어느덧 앞을 내다보고 투자하는 것은 정석으로 자리잡았다.그러나 이런 투자에 딴죽을 거는 인물이 있다.바로 박정구 가치투자자문 사장이다.그는 미래를 믿지 않고 신경쓰지도 않는다.오로지 과거로 승부한다.

박 사장은 국내 가치투자 고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동원증권과 교보생명 주식부와 삼성투신운용 매니저를 거쳐 2002년부터 가치투자자문 대표를 맡고 있다.20년간 국내 주식시장에서 운용 노하우를 쌓아오며 그만의 가치투자를 특화했다.가치투자에도 등급이 있다.정치 성향으로 보자면 그의 투자 스타일은 '극보수'로 분류된다.증권사에서 그를 '극보수 가치투자자'로 부르는 이유다.

투자철학이 비슷한 가치투자자들도 박 사장의 투자방식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그가 포트폴리오에 담는 상당수 종목이 성장성 한계에 이른 업종이거나 유동성 부족 현상이 심각한 종목이기 때문이다.그러나 박 사장이 거둔 성과는 놀랍다.가치투자자문이 2002년 8월 말 설정한 'V펀드'의 누적 수익률(올해 1월 말 기준)은 711%로 같은 기간 코스피지수 상승률 123%를 크게 웃돌고 있다.

비결이 뭘까.그의 대답은 역시 원론적인 그의 투자철학을 담고 있다."미래 수익가치는 대단히 보수적으로 가정하고 과거 자산가치에 초점을 두는 방식을 선호합니다.보수적인 가치투자자는 투자하는 기업의 경영환경이 미래에 크게 개선되지 않을 것으로 보고 투자하죠.많은 사람이 미래를 보고 투자하지만 그러다 보니까 낙관적으로 가정하고 밸류에이션(적정 주가 수준)을 무시하기 때문에 결국 손실을 보는 것이죠."

투자자라면 모두 본질가치 대비 주가가 싼 주식을 사서 본질가치가 반영되길 기다린다.이런 투자 방식이 다름 아닌 가치투자다.본질가치는 자산가치와 수익가치를 더한 값인데,여기서 자산가치는 과거가치이고 수익가치는 미래가치다.투자시 자산가치와 수익가치 가운데 어느 쪽에 비중을 두느냐에 가치투자의 등급이 매겨지는 셈이다.

그는 미래 전망을 믿지 않는다.애널리스트의 말은 물론 워런 버핏의 말이라고 해도 꿈쩍하지 않을 것이다.주가지수에도 별 관심이 없다.단지 과거 자산가치를 꼼꼼히 분석하는 데 주력한다.극단적으로 향후 수익이 나지 않더라도 자산가치보다 주가가 눈에 띄게 낮은 상황이라면 수익이 기대된다는 얘기다.반면 미래 수익가치는 성장 가능성이 높을수록 예상이 빗나갈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특히 높은 성장 가능성이 주가 상승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에스원을 예로 들어 보죠.에스원은 상장 후 5년간 이익이 2배씩 증가하는 성장세를 보였습니다.그러나 주가는 이미 반영돼 오르지 않았어요.결국 미래 수익가치보다는 밸류에이션을 어떻게 구하느냐가 중요합니다.종종 밸류에이션을 무시해 '좋은 회사'와 '좋은 주식'을 혼동하는 오류가 나타납니다."

삼성전자나 SK텔레콤도 좋은 회사인 것은 틀림없지만 과거와 달리 현재 좋은 주식이라고 말하긴 힘들다고 덧붙인다.박 사장은 성장기업도 적절한 밸류에이션에 사지 않으면 주가가 오르지 않고,오히려 기대감이 무너지면 폭락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그는 기업의 과거를 공들여 분석한다.박 사장의 컴퓨터에는 수백개 상장사에 대한 분석자료가 빼곡히 담겨 있다.자산가치는 물론 수익가치를 판단할 경우에도 그는 영업이익률과 시장 추이 등 과거를 중시한다.미래는 과거의 연장선이라는 설명이다.

무엇보다 자산가치가 중요하다.자산가치는 재무제표에 나오는 기업 자산에서 부채를 뺀 자기자본을 발행주식 총수로 나누면 쉽게 구할 수 있다.그러나 여기엔 함정이 있다.장부가와 실질가치의 보이지 않는 차이가 엄청나기 때문이다.박 사장은 이 차이를 찾아내는 것을 '가치'를 발굴하는 작업이라고 한다.

가령 동일방직은 강남에 1000평 부지를 보유하고 있는데 장부가는 35억원에 불과하다.실질가치는 1000억원대에 달한다.최근 영국계 '장하성 펀드'로 불리는 랙시파트너스가 경영 참여를 선언한 삼부토건도 마찬가지다.자회사로 보유한 서울 역삼동의 르네상스호텔은 공시지가만 2800억원대인데 장부가는 194억원에 지나지 않는다.고속버스터미널 이전 가능성에 최근 급등한 천일고속도 고속버스터미널(공시지가 7056억원) 지분 15%의 장부가가 겨우 14억원으로 잡혀 있다.

"최근에 조사해 보니까 상장사 1600개 가운데 700개 기업이 주당순자산비율(PBR)이 1배 미만입니다.이들 700개사 가운데 자기자본이익률(ROE)이 8%를 넘는 곳은 300개에 달합니다.자산가치 이하에 주가가 형성된 데다 8%씩 이익을 내고 있는데 시장에서는 적자로 예상한다는 얘기죠.그 중에서도 심하게 디스카운트된 종목을 사서 기다리면 됩니다.유동성이 낮아 디스카운트가 많이 된 주식은 금상첨화겠죠."

그러나 개인투자자는 너무 빨리 수익을 원하는 게 탈이라는 지적이다.박 사장은 2005년 9월 27개 종목으로 짠 포트폴리오를 아직 거의 그대로 갖고 있다.보통 2~3년은 기다린다.현재 운용 규모는 약 1000억원으로 크지 않다.연기금이나 보험사 등 '큰손'들의 자금을 받지 않기 때문이란다.최소 2억원 이상의 개인 또는 일반법인 자금을 유치해 높은 성과수수료를 받으면서 운용한다.

그는 '가치'를 발견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지나치게 낙관적인 개인들은 직접 투자를 하지 말라고 강조한다.박 사장은 3분 거리의 집과 회사를 오가면서 하루종일 기업 감사보고서와 사업보고서를 탐독하는 것도 모자라 주식 관련 꿈까지 꾼다고 한다.

조진형 기자 u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