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경제 정책을 펼 때 공개된 준칙을 정하고 일관되게 이를 따르는 게 나을까,아니면 경제 상황에 맞춰 그때 그때 필요한 정책을 시행하는 게 나을까.

단순한 질문 같지만 이 같은 '준칙(rule) 대 재량(discretion) 논쟁'은 오랫동안 경제학자들을 괴롭혀 왔다.

물론 정답을 가리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요즘은 준칙주의에 힘이 실리고 있다.

가령 정부가 경제 정책의 목표(준칙)로 '물가를 자극하지 않는 범위에서의 경제 성장'을 제시했다고 치자.이 경우 웬만한 상황에선 인위적 경기 부양에 나서선 안 된다.

하지만 정부는 경기에 민감하다.

경기가 나빠지면 지지율이 떨어지고 선거에 패할 수도 있다.

그래서 경기 부양의 유혹에 쉽게 빠진다.

정부가 준칙을 제쳐 두고 인위적으로 경기 부양에 나서면 어떻게 될까.

1930년대 대공황 때 탄생한 케인스 이론은 정부가 돈을 풀면 소비가 늘고 생산이 증가하므로 불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봤다.

경기부양 정책이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1970년대 오일 쇼크로 세계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에 빠지면서 이런 통념이 깨졌다.

정부가 돈을 풀었는데도 경기는 좋아지지 않은 채 물가만 뛰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경제 주체들이 과거 경험을 통해 정부가 돈을 풀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예상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즉 인플레이션으로 임금이 오르면 기업들은 그만큼 고용을 줄이고 그 결과 경기는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경제학자들은 이 같은 현상을 '필립스 곡선이 수직으로 선다'고 표현한다.

인플레이션과 국내총생산(GDP)의 관계를 나타내는 필립스 곡선은 통상 우상향 곡선의 형태를 띤다.

GDP가 늘어나면 물가가 오르는 반면 GDP가 줄면 물가는 안정된다.

정부가 잠재 성장률 이상으로 GDP를 끌어올리기 위해 총수요 진작 정책을 펴면 단기적으로는 GDP와 물가가 함께 상승한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이 같은 공식이 통하지 않는다.

GDP는 잠재 성장률 수준으로 되돌아오는 반면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로 물가 상승률은 높아지고 만다.

결국 필립스 곡선이 똑바로 서게 되는 것이다.

실제 1970년~1980년대 초 미국 경제가 이 같은 일을 겪었다.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72년만 해도 3%대에서 안정됐지만 1974년에는 10%를 돌파했고 1980년 초에는 14%까지 치솟았다.

오일 쇼크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정책 당국의 총수요 확대 정책이 주요인이란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실제 미국은 1974년부터 상당 기간 실질 금리가 마이너스 상태를 유지할 정도로 저금리 정책을 폈다.

이 같은 사례는 특정 시점에 적합한 재량적 경제 정책이 장기적으로는 부정적 효과를 야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대다수 선진국들이 물가안정 목표를 정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재량적 경제 정책의 폐해를 의식해서다.

'준칙 대 재량 논쟁'은 특허권 보호를 설명하는 데도 유용하다.

가령 신기술이나 신상품이 발명됐을 때 특허를 주지 않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한다면 단기적으로 사회 후생을 더 높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결과가 달라진다.

신기술을 개발해 봐야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없다면 창의적 활동에 나서는 사람은 줄어들게 된다.

결국 장기적으로는 사회 후생이 감소하는 것이다.

선진국들이 특허권 보호에 나서는 이유다.

정부의 재난구호 프로그램도 장기적으로는 사회 전체적으로 '마이너스' 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경제학자들은 지적한다.

예컨대 미국 정부는 매년 자연 재해가 발생한 지역을 연방 재해지역으로 선포하고 막대한 복구 예산을 투입한다.

여기까지는 당연하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다.

매년 자연 재해가 반복되는 위험 지역에는 주민들이 거주하지 않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는 게 경제학자들의 생각이다.

하지만 정치적 이유 등으로 인해 정부는 이런 정책을 시행하지 않는다.

그 결과 매년 비슷한 지역에서 자연 재해가 발생하고 그 때마다 정부는 복구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

위험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도 재해가 발생하면 정부가 도와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냥 눌러 살게 된다.

미국 경제학자인 핀 키들랜드와 에드워드 프레스콧은 이 같은 논의를 학문적으로 정립해 200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이들은 정부가 재량적 경제 정책에 의존할 때보다 준칙을 정하고 일관성 있게 이를 시행할 때 더 나은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수많은 준칙 중에서 어떤 것을 채택할지 선택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또 경제 환경이 크게 변하면 준칙도 바뀌는 것이 맞다.

하지만 선진국들이 한 번 정한 준칙을 바꾸는 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은 새겨 둘 필요가 있다.

김배근 <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 거시경제연구실 과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