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 국제통화체제는 미국의 달러만이 진정한 기축통화(국제거래의 중심 통화)로 사용돼 온 소위 '달러패권체제(팍스달러리움)'다.

하지만 최근 들어 달러의 기축통화로서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런 논의의 배경에는 2000년대 들어 크게 늘어난 미국의 경상 및 재정수지 적자,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에 따른 미국 경제의 불안정성 증가,그리고 달러 가치의 하락 등이 있다.

실제로 2002년 초반 이후 미국의 주요 무역대상국 통화들에 대해 물가 수준을 감안한 달러의 실질 가치는 지속적으로 하락해 올 11월까지 약 23% 감소했다.

통계를 보더라도 세계외환보유고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9년 71%에서 올해 2분기에 65%로 하락한 반면,같은 기간 유로의 비중은 18%에서 26%로 증가했다.

그렇다면 달러패권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앞서 먼저 국제통화체제에서 달러패권이 유지됨으로써 미국이 얻는 주요 경제적,정치적 이득이 무엇인지 살펴보자.우선 달러가 글로벌 통화로 사용됨에 따라 미국은 국제적 세이녀리지(seigniorage; 화폐발행차익)를 얻는다.

즉 미국은 저렴한 달러지폐 인쇄비용만으로 외화나 해외의 실물자산을 취득할 수 있는데,이를 통해 외국으로부터 무이자로 돈을 차입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누린다.

둘째로 미국은 대외적자를 메울 자금을 자국통화인 달러로 충당하기 때문에 대규모 국제수지적자가 있더라도 비교적 자유롭게 국내 거시경제정책(통화·재정정책)을 시행할 수 있다.

셋째로 국제통화체제에서 달러의 월등한 지위는 미국의 국제적 위치를 상징하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이는 미국의 '연성권력(soft powerㆍ 믿음 또는 인식체계를 기반으로 타국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능력)'의 주요 요소로 작용한다.

마지막으로 달러가 글로벌 통화로 통용됨에 따라 미국의 '경성권력(hard power;군사력이나 경제력 등을 기반으로 타국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능력)' 역시 강화된다.

다른 국가들이 달러를 사용함에 따라 이들과 미국 사이에 비대칭적 통화 의존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미국은 외국의 영향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울 수 있고,대외정책을 수행할 때 외국에 대한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행사하기가 용이해진다.

이렇듯 미국은 달러가 기축통화로 사용됨으로써 막대한 경제적,정치적 이익을 보기 때문에 미국이 달러패권의 급격한 하락을 좌시하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역사적으로도 미국은 달러독점체제 유지에 적극적이었다.

한 예로 이라크가 석유 결제를 달러에서 유로로 변경한 것이 미국의 이라크 전쟁 이유 중 하나였다는 것이 최근에 발간된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회고록에 기술돼 있다.

물론 미국이 달러를 지배적인 통화로 유지하고자 노력할지라도 다른 국가들과 시장주체들이 점차 달러의 사용을 줄이고 다른 통화의 사용을 늘리면 달러패권의 유지는 현실적으로 어려워진다.

현재처럼 달러에 대한 신뢰가 하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가능성은 이전에 비해 분명히 높아졌다.

그러나 1971년 브레튼우즈체제 붕괴 이후 달러패권 시대 종식 논의는 새삼스러운 이슈가 아니다.

또한 단순한 달러 가치 하락이 단기간에 직접적으로 달러패권의 몰락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지 않아 보인다.

이는 197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중반 달러의 실질가치가 현재보다 낮았던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달러의 기축통화로서의 역할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확인된다.

게다가 세계외환보유고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도 1990년대 중반의 비중보다는 높다.

더욱이 어떤 통화가 달러를 대체하는 새로운 기축통화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들이 충족돼야 한다.

우선 통화의 미래가치에 대한 광범위한 신뢰가 형성돼야 하고 높은 통화가치를 지녀야 한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통화 발행국은 물가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교환이 용이하고 해당 통화로 표시된 자산의 가치에 대한 적절한 예측가능성이 보장돼야 한다.

이는 완전히 개방되고 고도로 발달한 금융시장을 필요로 한다.

셋째,사용의 편익을 증대시키기 위해 통화발행국의 경제가 절대적 규모에서 크고 세계경제에 고도로 통합돼 있어야 한다.

이상의 세 조건이 충족된다고 할지라도 기존에 사용하던 통화를 계속 사용하고자 하는 관성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통화가 기존의 글로벌 통화를 대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한 통화가 이러한 관성을 타파하고 새로운 글로벌 통화가 되기 위해선 기존의 글로벌 통화가 제공하는 편익에 더해 상당한 수준의 새로운 편익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현 시점에서는 어떠한 통화도 이러한 새로운 글로벌 통화의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가장 유력한 후보인 유로도 마찬가지다.

최근 지속적인 달러 약세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새로운 기축통화에 대한 열망이 증가함에 따라 유로의 역할이 어느 정도 증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유로가 달러의 지위를 완전히 대체하기 보다는 제한적인 대체통화로 사용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앞으로 달러독점체제에서 달러·유로·엔 등 과점체제로 국제통화질서가 재편될 경우에 대비,다각적인 대응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최형규 <한은 금융경제연구원ㆍ동북아경제연구실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