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5명당 車 1대 생산… 나라 전체가 '자동체 밸리'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중심가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차를 타고 20분가량 가면 서울 강남구 신사동이나 대치동을 연상시키는 '수입차 거리'가 나온다.

4차선 도로 주변에 BMW와 아우디 등 최고급 브랜드에서부터 혼다와 닛산 등 일본 대중 브랜드,피아트,마즈다 같은 소형차 전시장까지 없는 게 없다.

이곳 BMW 매장의 월 판매량은 50대.인구 1000만명이 넘는 서울에서도 한 달에 100대 이상 판매하는 고급 수입차 매장이 드문 점을 감안하면 인구 60만명인 도시의 판매량으로는 적지 않은 수치다.

"최근 몇 년 사이 외국 기업의 진출이 늘어나면서 이들의 투자 자문을 해 주는 변호사 등 전문직 계층과 외국 기업 임원들이 '신흥 부유층'으로 등장,고급차 판매가 급증하고 있다"(마렉 하바록크 세일즈 매니저)는 설명이다.

활발한 소비는 일부 상류계층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외국 기업의 진출과 함께 일자리를 얻게 된 젊은이들은 과거 공산정권 시절 부모세대가 국가로부터 보급받아 20여년째 타고 있는 소형 스코다 차량을 물려받는 대신 은행에서 신용대출을 받아 폭스바겐이나 혼다 등 수입차를 구입한다.

시내 중심가의 영국계 할인점 '테스코' 매장은 평일 오후에도 15분 이상 줄을 서서 기다려야 계산대를 빠져나올 수 있을 정도로 손님들로 북적인다.

테스코 매장에서 만난 마틴 라반트씨(40)는 "1993년 체코와 분리된 직후 경제가 쇼크를 받아 한동안 침체의 늪에 빠졌지만 체제 전환을 잘 마무리한 지금은 훈풍이 느껴질 정도로 경제가 잘 돌아간다"고 말했다.


◆자동차·전자 '유럽의 공장'

슬로바키아 경제의 원동력은 2004년 유럽연합(EU)가입 직전부터 봇물을 이루고 있는 외국인 투자. 일례로 주민 대부분이 밀농사를 짓던 북서부의 소도시 질리나는 기아자동차 공장이 들어선 것을 계기로 현대적인 공업도시로 급속히 탈바꿈하고 있다.

2004년 4월 기아차가 공장을 짓기 시작하면서 인구 8만명의 작은 도시에 호텔이 들어서고 도로와 철도가 새로 깔리고 국제공항이 생겨났다.

1970년대에 지은 회색빛의 낡은 건물 바로 옆에 알록달록한 현대식 빌라가 신축되고 있는 모습은 이 도시가 유례없이 빠른 변화와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질리나 폴롬 호텔에서 근무하는 아드리아나 루시아씨(26)는 "진학이나 취업을 위해 질리나를 떠났던 젊은이들이 기아차 공장이나 관련 서비스 직종에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 다시 돌아오고 있다"고 달라진 분위기를 전했다.

질리나뿐만 아니다.

슬로바키아 자체가 거대한 자동차단지로 바뀌는 모양새다.

유럽판 '디트로이트'라 부를 만하다.

독일 폭스바겐은 브라티슬라바에,프랑스 PSA(푸조.시트로앵)는 트르나바에 진을 치고 연간 30만~40만대의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다.

2009년이면 슬로바키아 자동차 산업의 규모는 연간 생산량 110만대,고용 인원 1만6500명에 이르게 된다.

슬로바키아 인구가 540만명인 점을 감안할 때 5명이 자동차 한 대를 생산하는 셈이다.

자동차업종뿐이 아니다.

삼성전자와 소니는 기존 공장 외에 각각 LCD패널 공장과 LCD TV 공장을 추가로 짓고 있다.

이 밖에 미국의 가전업체 월풀과 철강회사 US스틸,컨설팅 회사 액센추어 등 슬로바키아에 진출해 있는 글로벌 기업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슬로바키아는 지난해 65건,6억700만유로의 투자를 유치한 데 이어 올해 6월 현재 120건,34억3000만유로 규모의 투자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친기업 정책,글로벌기업에 러브콜

외국 기업의 지속적인 투자 속에 슬로바키아는 지난해 사상 최고인 8.3%의 국민총생산(GDP) 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호황을 누리고 있다.

올해 성장률은 이보다 높은 8.5%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른바 '비세그라드(Visegrad) 4국'이라고 불리는 동유럽의 4대 개발도상국(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헝가리)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수준이다.

반대로 한때 20%까지 치솟았던 실업률은 2001년을 기점으로 감소세로 돌아서 지난해에는 13.3%로 떨어졌다.

슬로바키아 정부는 기업이 투자를 하면 지역에 따라 투자액의 최대 50%까지를 세금에서 공제해 준다.

기아차는 토지를 무상으로 제공받기도 했다.

체코,폴란드,헝가리 등 인접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슬로바키아의 법인세율과 부가가치세율은 각각 19%로 가장 낮고 근로자 1인당 월 평균 임금도 652유로로 가장 저렴하다.

여기에 유럽의 정중앙에 자리잡고 있다는 지리적 이점과 EU 회원국으로서 유럽시장에 무관세로 접근할 수 있는 점도 장점이다.

양영찬 삼성전자 슬로바키아법인 상무는 "중국이나 동남아보다 인건비는 비싸지만 관세가 면제되고 물류비가 절감돼 유럽시장에 공급할 물량은 슬로바키아에서 생산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말했다.

브라티슬라바·질리나(슬로바키아)=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