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훈 중앙대 총장은 강약이 있는 빠른 말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 팔을 크게 움직이는 모습은 지휘자를 연상케 했다.

그는 침체된 한국 국악계에 창조의 바람을 불어넣은 독보적 '음악가'다.

1986년 아시안게임,1988년 서울올림픽,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식에서 음악 총감독을 맡았다.

당시 국악을 보편적 음악 언어로 풀어내 전 세계인이 즐길 수 있도록 했다는 평을 들었다.

그의 행보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1987년 국내 최초의 순수 민간 국악관현악단인 '중앙국악관현악단'을 창단했다.

8년간의 악단 경험은 국립국악관현악단 창단으로 이어졌다.

여세를 몰아 1994년에는 세계 최초로 '한·중·일 아시아민족악단'을 만들었다.

2005년 3월 중앙대 초장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그는 음악인으로서 한길만을 달려왔다.

박 총장은 시작한 일은 반드시 끝장을 보는 성격이다.

10대 시절,우리 가락이 좋아 남사당 패거리를 따라다녔다.

모진 고통 끝에 결국 하고 싶은 음악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경험이 근성있는 성격을 만들었다.

취임 후 8개 학과를 통폐합 구조조정할 때도 그의 '뚝심'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또 장르를 넘나들며 영역을 파괴한다.

그의 음악에 장르를 넘나드는 오묘함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윤문식,김성녀씨와 '허생전''별주부전' 등 마당놀이도 작곡했다.

도올 김용옥 교수를 만나면서 불교 음악에 심취해 '교성곡''찬불가' 등 불교곡도 수십편 작곡했다.

대학에 한류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석사학위 과정인 '한류 아카데미' 설립도 학문 간 벽을 허물고 '통섭'을 시도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요즘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임기가 1년6개월 정도 남아 반환점을 돌면서 마음이 더욱 바빠져서다.

분초를 다투며 약속을 잡는 것은 물론이고 바쁘면 식사도 대충 학교 근처 식당에서 교직원들과 한다.

"송도에 제3캠퍼스 문제 때문에 조금 있다가 인천 시장과 면담을 하러 가야 합니다.

애초에 52만8000㎡ 얘기를 했는데 9만9000㎡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해서요.

일단 되든 안 되든 부딪쳐 보는 거죠."

인터뷰를 마치고 총장실을 나설 때도 그와의 면담을 원하는 여러 팀들이 인터뷰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1948년 경기도 양평 출생
△66년 서울국악예술고 졸업
△76년 중앙대 음악학과 졸업
△83년 일본 무사시노 음악대학원 석사
△86아시안게임·88서울올림픽 음악담당
△87년 중앙관현악단 창단
△98년 동국대 대학원 철학박사
△2001년 중앙대 부총장
△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식 음악감독
△2005년~현재 중앙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