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의 방북을 계기로 북핵 협상이 1단계인 영변 핵시설 폐쇄를 무사히 마치고 2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기대감이 높아졌다.

5년 만에 성사된 미국 고위 관리의 방북으로 북·미 양자 간 신뢰도 생겼다.

힐 차관보는 22일 평양 출발 직전 "포괄적 문제 해결을 원한다"고 말했다.

북한 입장을 대변해온 조총련계 조선신보도 이날 "부시 정권이 양자 관계 개선에 의한 포괄적인 문제해결을 지향한다면 조선도 보조를 재빨리 맞춰나가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화답했다.

◆모멘텀 되찾은 6자회담

힐 차관보는 이번 방북의 의미를 "6자회담의 모멘텀을 되살리는 게 목표였다"고 정리했다.

힐 차관보는 북한에서 2·13 합의에 따라 영변 핵시설을 신속히 폐쇄하겠다는 확답을 받았고 다음 단계인 시설 불능화에 대해서도 "준비가 돼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말했다.

남북한과 미·중·일·러는 7월 초 수석대표 회의를 갖고 북한의 핵물질을 전면 규명하고 핵시설을 불능화하기 위한 다음 단계 협상에 착수할 예정이다.

힐 차관보가 북한 외교 실세인 강석주 제1부상을 만나 속 얘기를 나누거나 심지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통큰' 제안을 교환할 수도 있다는 기대도 없지 않았지만 실현은 안 됐다.

◆신뢰는 구축…북 변해야 돌파구

정부 당국자는 "북·미 간 신뢰가 쌓이는 토대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북·미 간 원칙 차이가 좁혀진 것은 아니어서 북핵 협상은 여전히 난제다.

조선신보는 "조선의 지향은 미국과의 대결전을 총결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으나 "현재처럼 부시 정권이 상대방의 핵무장 해제를 선차적 목표로 내걸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북·미 관계에 정통한 서울의 외교 소식통은 "북한은 핵시설을 동결만 해놓은 상태에서 미국과 협상으로 안전 보장 등 모든 것을 얻어내겠다는 것이고 미국은 북한이 핵무기까지 폐기할 때 수교와 평화 협정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라고 분석했다.

피터 벡 국제위기관리기구 동아시아사무소 소장은 "북한이 다음 관건인 고농축우라늄프로그램 신고 요구를 수용할지 불확실하다"며 "부시 정부가 융통성을 보인 만큼 북한도 변해야 돌파구가 마련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동시 행동 원칙 지켜야

부시 정부가 중동 문제 해결에 실패한 후 북핵 문제 해결로 업적을 남기려는 욕심을 갖고 있다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하지만 북한의 양보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비핵화와 평화 협정이라는 궁극적인 목표까지 갈 수 있을지는 전망이 엇갈린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핵은 북한에 유일하게 남은 안보 카드이기 때문에 북핵 협상은 미국이 해결의 계기를 만들어왔고,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이 전략적 결단을 내렸기 때문에 북한이 '동시 행동의 원칙'을 실천하면 부시 정부 임기 내 수교도 기대할 수 있다"고 낙관했다.

반면 서울의 외교 소식통은 "북핵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고 협상의 토대를 마련한 후 다음 정권으로 넘기는 게 현실적 목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지영 기자 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