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측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툭툭 내던지는 무뚝뚝한 경상도 사투리. 기자들과 모두 1대 1로 술잔을 주고받는 두주불사형 음주스타일. 구릿빛으로 그을린 얼굴. 최 사장은 터프한 CEO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휴대폰을 꺼내 직접 찍은 손녀의 사진을 보여줄 때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따듯한 할아버지'로 돌아와 있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최 사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독일 가곡 '들장미'를 부르자 우리는 그에게 씌워놓았던 마초맨 이미지를 벗기고, 로맨티스트라는 새 옷을 입힐 수밖에 없었다.
최 사장은 강함 속에 부드러움을 감추고 있는, 아니 강함과 부드러움을 겸비한 CEO다.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들과의 격의없는 대화는 광화문 근처 음식점에서 5시간을 넘게 이어졌다.
▶▶'강함+부드러움' CEO, 한경 기자들에 속내 털어놓다
#인문학 관심 컸던 청년시절
-고향(경북 영천) 자랑 좀 해주시죠.
"영천은 반도체 분야에서 유명인사를 많이 배출한 지역이죠.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종덕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가 영천 출신입니다."
-초등학교 때 대구로 이사했는데 '맹모삼천' 차원인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서울 분이셨던 어머니는 고향에서 살고 싶어 하셨죠.하지만 6·25전쟁 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큰아버지가 낙선하면서 우리집도 덩달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됐습니다.치과의사인 아버지는 병원을 더 열심히 운영해야 하니까 생활기반이 다른 먼 곳으로 이사갈 엄두를 못 냈습니다. 그래서 서울로 못 오고 대구로 이사간 거죠."
-부친이 의사였으니 유복하셨겠네요.
"꼭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술을 꽤나 좋아하셔서 많은 돈을 술값으로 바치셨습니다. 다른 의사 친구 분들은 야산도 있고 논도 있었는데 우리는 대구에 있는 집 한 채가 부동산의 전부였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의사였기 때문에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었던 건 맞죠.당시 공대 동기생 36명 가운데 집에서 보내온 돈으로 기숙사비를 낼 수 있었던 사람은 저를 포함해 두 명밖에 없었으니까요."
-공대 진학은 스스로 결정하셨나요.
"미학이나 심리학을 전공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고3 때는 전공보다는 커트라인(합격가능선)을 갖고 지원할 과를 정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경북대 의대를 가라고 했습니다. 내심 서울대 의대 진학을 바라던 아버지가 잔뜩 열을 받으셔서 의대 가지 말고 서울대 공대에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공대생이 됐죠."
-다시 대학가면 미학을 전공할 건가요.
"미학을 전공하면 사장은 못할 것 같네요.(웃음) 다시 대학갈 기회가 있으면 상과대학을 갈 겁니다. 돈 버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요."
#피 뽑고 술 마시다
-원래 두산 출신이 아니시죠.
"첫 직장은 옛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신진자동차 였습니다. 이후 대한전선으로 옮겼는데 그 회사가 대우전자로 바뀌었죠. 두산그룹엔 1977년 두산기계에 합류했습니다."
-당시로선 직장을 많이 옮긴 편 아닙니까.
"실제로 주위에서 직장을 너무 자주 옮기는 것 아니냐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전 직장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기계공학과 출신이 자동차 회사, 전자업체(두산전자)에 다니다 공작기계 만드는 회사에까지 다니게 되면서 시너지 효과가 난 거죠.특히 임원이 되니까 다양한 경험이 좋은 자산이 되더군요."
-CEO는 몇 년 하셨나요.
"만 9년 정도 됐습니다."
-두산그룹 CEO 중에서 연세가 가장 많으신가요.
"주력사 CEO 가운데는 '연식'이 가장 높습니다. 66학번 이지요. 이남두 두산중공업 사장이 69학번, 정지택 두산건설 부회장은 70학번,새로온 김기동 두산건설 사장은 70학번입니다."
-연식이라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일 하면서 '엔진이 몇 년식이냐'는 말을 자주 하다보니 습관이 된 것같습니다. 회사 내에서도 '아무개는 연식이 뭐냐'고 자주 얘기하곤 합니다."
-사장님은 배기량도 클 것 같습니다(좌중웃음).
"오늘 헌혈을 했는데 어지간하면 320cc 뽑는데 전 체중 때문에 400cc를 뽑았습니다. 피 뽑고는 술 먹지 말라고 적혀 있었는데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위기와 기회의 직장생활
-오래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위기의 순간도 많았을 텐데요.
"월급쟁이 하면서 '이게 내 인생 끝이구나'하는 위기가 네 번쯤 찾아왔습니다. 두산 페놀 사건이 그 중 하나고요. 외환위기 직후엔 자금경색 때문에 곤욕을 치렀습니다."
-두산인프라코어는 '연합군'같은 조직인데 통솔이 잘 되던가요.
"2005년 4월 대우종합기계를 인수한 뒤 사장으로 취임할 때 단신 부임했습니다. 방법이 있나요. 직원들이 절 좋아하게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죠.매일 직원들과 술자리를 가지며 격의없는 대화를 나눴지요."
-이질적인 문화 때문에 융화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대우종합기계 출신들은 양질입니다. 취임 후 꼼꼼히 살펴보니깐 실력이 대단한 거예요. 그때부터 그들의 기를 어떻게 살릴까를 고심했습니다. 지금 100명의 임원 가운데 두산 출신은 5명밖에 안 됩니다. 인정해주는 게 기를 살리는 거죠."
#유학 가고싶었는데…
-다시 과장 시절로 돌아간다면.
"도덕성 문제에 더 신경쓸 것 같습니다. 과장 시절에는 관련 업체 사람이 7만원어치 술을 사주고 차비로 3만원을 챙겨주는 일이 흔했습니다. 지금은 기업이 바뀌기 시작했지만 예전에는 그게 도덕적으로 나쁜지 몰랐습니다. 그런 행동방식이 바뀌어야 우리 기업이 보다 발전할 수 있습니다. 전에는 그걸 교육시킬 사람도 없었고 사장도 잘 몰랐습니다."
-해외에서 공부하거나 근무하실 생각은 없으셨나요.
"두산그룹 역대 CEO를 통털어 해외파,유학파 아닌 임원 가운데 사장 된 건 저밖에 없습니다."
-왜 외국에 나가지 않았나요.
"유학은 포기했구요. 해외근무는 회사에서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럴 기회가 생기면 왠지 선배들이 말리더군요."
-영어 스트레스 많으시겠네요.
"장사하는 데 문제없습니다. 콘텐츠가 중요한 거 아닙니까. 서바이벌 잉글리시는 합니다."
#독심(毒心)을 품어야 CEO 된다
-언제 처음 CEO 꿈을 꾸셨나요.
"1985년 부장 승진 인사 때 혼자 누락되면서 싹을 틔웠다고 할까요. 그때 경쟁자를 이기겠다는 독심(毒心)을 품었죠.'두고 보자'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고,3년 후 먼저 부장으로 승진했던 동기들과 같이 이사가 됐습니다. 월급쟁이가 사장을 꿈꾸지 않으면 직장생활의 의미가 없습니다.CEO가 되기 위해서 젊었을 때부터 마음을 다잡아야 합니다."
-임원이 되셨을 때 많이 기쁘셨겠어요.
"만 39세에 '별'을 단 셈인데 돌이켜 보면 직장생활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었습니다. 따라주는 사람이 많아서 별을 달았다고 당시 생각했죠.그 뒤부터 후배들에게 더 잘해줬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능력 있는 리더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죠."
-인생에서 운과 노력이 차지하는 비율은 어느 정도라고 보시는지요.
"운구기일(運九氣一)인 것 같습니다. 전 운이 좋아서 그런지 시험에도 별로 떨어져 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주판(주산)시험까지도 쉽게 붙었고요. 승진 때 한 번 누락된 것 말고는 운이 좋았습니다."
#주량은 사회생활과 비례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떻게 푸시나요.
"직원들 다 불러다 놓고 술 한잔 마십니다. 특히 스트레스를 주는 부하직원들과 술을 마시며 '이놈 저놈' 하면서 티격태격하면 자연스럽게 스트레스가 풀립니다. 그날 있었던 일을 서로 다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앙금도 남지 않고요."
-주량은 어느 정도인가요.
"1977년 두산그룹에 입사할 때는 생맥주 500cc 한 잔도 버거웠습니다. 2잔 이상이면 토했을 정도였지요. 직장생활을 오래 하면서 술 실력이 늘었나 봅니다. 지금은 '처음처럼' 2~3병 정도는 마십니다.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 술자리를 합니다. 하루 정도는 아내 눈치가 보여 도저히 못하죠."
-술을 매우 빨리 마시는 편이신데요.
"두산 방식으로 마셔서 그렇습니다. 인프라코어 전신인 대우 방식과는 좀 다르지요. 대우 방식은 먼저 밥,고기를 먹고 맥주를 마신 다음 2차를 갑니다. 끝나면 밤 12시쯤 되죠.두산 방식은 고기를 먹으면서 소주만 마십니다. 맥주 마실 때는 밥을 먹지 않습니다. 오후 7시쯤 시작하면 늦어도 9시에는 술자리를 끝냅니다. 대우 출신 직원들은 빨리 마시고 일찍 끝나니까 이 방식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술을 많이 드시는데 건강 유지 비결이 있나요.
"대학 2학년 때부터 40여년간 피워온 담배를 3년반 전에 끊었습니다. ('처음처럼'을 만드는) 두산그룹에 몸 담고 있으면서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힘들고요."
-조직의 이상적인 리더는 '똑똑하고 게으른' 리더라고 하던데요.
"보통 오전 7시30분까지는 출근합니다.더 일찍 출근해도 비서 제외하곤 8시30분 이전에 다른 임직원에게 전화를 건 적이 없습니다."
#아내를 위한 노래
-사모님 자랑 좀 해주세요.
"아직도 49kg입니다.부산사람이고요.대학 졸업한 뒤 만나 쫓아다녔습니다.다섯 살 차이인데 처음 만났을 때 마음이 지금도 변함 없습니다.지금도 꼼짝 못합니다."
-일요일엔 꼭 성당에 가신다면서요.
"새벽미사를 꼭 갑니다. 유치원 때부터 성당에 다녀서 습관이 됐죠.종교를 갖는 것은 좋은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다 보니 아내와 관심사 및 취미가 같다는 점도 매우 다행스런 일이고요. 아내는 교리공부에 열심이죠.까르멜 수도원에서 하는 교리공부 코스가 가장 어려운데 아내는 끈기있게 다녔죠.전 2년반 따라다니다 숙제도 많고 어려워서 포기했습니다."
-(그때 십자가 사진이 있는 휴대폰 메인화면을 보여준다) 그게 뭐죠.
"두산그룹 연수원인 연강원의 성당 십자가 사진입니다. 연강원 안에 있는 조그만 채플이죠."
-세례명은 뭔가요.
"그레고리오입니다.(웃으며)한국말로는 '고래고기'라고 하죠.박용만 부회장이 오너 일가 중에는 가장 신심이 높은 편입니다."
-박 부회장이랑 잘 통하겠네요.
"YM(최 사장은 박 부회장을 이렇게 불렀다)은 탁월한 전략가입니다.
매킨지 출신인 김용성 사장이 CSO(최고전략책임자)로 인프라코어에 합류했는데 YM의 능력을 당해내는 걸 못봤습니다. YM은 머리 구조가 전략 쪽으로 발달해 있는 것 같아요. 아이디어가 매우 많죠.저하고 의견 충돌도 거의 없었습니다. GE의 크로톤빌처럼 자유토론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그룹 연수원인 연강원을 개조하기도 했죠.연강원 식사 한 끼가 1만5000원입니다. 연수받으러 온 직원들이 잘 먹어야 한다는 YM의 지론 때문이죠.연수원 직원이 30명인데 연수받는 사람이 10명일 때도 있습니다."
#은퇴 후엔 수도원에 자주 갈 겁니다
-재테크는 어떻게 하시나요.
"글쎄,아내가 합니다.분당신도시 분양할 때 청약해서 106 대 1의 경쟁을 뚫고 붙었습니다.몇 년 살다가 3억1500만원에 팔고 서울 압구정동으로 이사왔습니다."
-주식 투자는 안 하세요.
"전 최근 5년간 벌어들인 수입 모두를 인프라코어 주식을 사는 데 썼습니다.수익률이 130% 정도라네요.분명한 것은 팔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거예요."
-은퇴할 나이가 되셨는데요.
"은퇴하면 전원생활을 할 참입니다.얼마 전까지는 전원생활에 대한 동경 같은 게 없었는데 요즘 생각이 바뀌었어요. 종부세 때문입니다.베짱이처럼 월급 모아 아파트 장만했는데 세금을 그리 많이 내라고 하니 미칠 지경 아닙니까."
-은퇴 후 특별한 계획이 있나요.
"세검정에 까르멜 수도원이 있습니다.자주 거기에 가서 기도하면서 살려고 합니다.아내도 이런 계획을 무척 좋아합니다."
-최근 감명 깊게 본 영화는.
"얼마 전에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가는 비행기 안에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오랜만에 다시 봤는데 감동이 여전합디다. 대학 다닐 때 처음 본 영화인데 여자 주인공이 수녀원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마지막에 대령과 만나서 호수 옆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도 감동적이었죠."
-감수성이 예민하신 것 같네요.
"음악에는 나름대로 조예가 있습니다. 고3 때 베토벤 합창 4악장의 보표를 자세히 읽을 정도였습니다. 베토벤 로망스 G메이저나 멘델스존의 3악장을 좋아하죠. (최 사장은 흥에 취해 괴테의 시에 베르너가 곡을 붙인 독일 가곡 '들장미'를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정리=송대섭/사진=허문찬 기자 dss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