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아차 그룹이 지난해 4월 발표했던 1조원의 사회공헌기금 활용 방안과 조성 일정을 1년2개월만에 내놓은 것은 법원의 요청때문이었다.

당초 그룹측은 정 회장의 항소심 공판이 끝난뒤 구체적인 기금 활용방안을 내놓을 예정이었으나 법원이 3월 첫 항소심 공판부터 이에대한 진행사항 등을 묻는 등 압박의 수위를 높이자 이를 앞당긴 것이다.


◇정회장 사회공헌기금, 어떻게 활용되나

정 회장은 22일 서울고법 형사10부(이재홍 수석부장판사) 주재로 열린 항소심공판에서 앞으로 7년에 걸쳐 1조원의 기금을 출연키로 하고 올해 1천200억원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첫 사업은 저소득층을 포함한 전국민이 무료로 문화적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공연시설 및 지역별 복합문화센터를 건립한다는 것이다.

서울시에는 오페라하우스 및 콘서트홀 등 1천500-2천석 규모의 최신 설비를 갖춘 공연시설을 지어주고 전국 광역시 및 도청 소재지에는 1곳씩 모두 12곳에 도서관시설과 체육시설, 문화시설이 혼용된 복합문화센터를 세운다는 것이다.

현대차는 이를 위해 학계, 문화계, 경제계, 법조계 등 사회 각층의 신망있는 인사들로 가칭 '사회공헌위원회'를 하반기중에 구성키로 했다.

이 위원회는 전권을 갖고 출연기금의 용도, 구체적 사용방법 및 운용 주체 등 이행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하지만 출연기금이 모두 문화센터에 활용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변호인단은 "정 회장은 환경친화적이고 지구 온난화를 예방할 수 있는 사회사업을 지원하는데도 출연기금이 사용되기를 바란다"고 밝혀 기금중 일부가 민간 사회단체의 환경운동이나 친환경 시설 구축에도 사용될 것임을 암시했다.

또 국내 부품.소재 업체들이 기술자금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점을 감안해 한국자동차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부품 소재업체의 기술개발 지원에도 쓰여야 한다는 자동차업계의 요구도 많아 어떤 형태로든 이에대한 지원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현대차측은 "일단 사회공헌기금의 계획 일부가 구체적으로 제시됨으로써 곧 실천방안들이 본격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돈은 어떻게 마련할까

정몽구 회장이 지난해 내놓기로 한 1조원의 돈은 일단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기아차 사장이 보유하고 있는 글로비스 주식(지분 60%)의 매각을 통해 조달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그룹은 사회적 책임과 윤리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경영권 승계 관련 의혹이 제기됐던 정회장 부자 소유의 글로비스 주식 전량 등 사재 1조원 상당을 조건없이 소외 계층과 불우이웃을 돕는 사회복지재단에 기부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정 회장 부자가 갖고 있는 글로비스 주식은 1천54만6천주(28.1%), 1천195만4천주(31.9%) 등 총 2천250만주(60%)로 당시 주가(4만1천-4만5천원)를 감안하면 얼추 1조원을 맞출 수 있었다.

그룹측은 "주가가 떨어져 모자란 돈은 정 회장이 또다른 사재를 털어서라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후 글로비스 주가는 2만원대까지 폭락해 '정 회장이 현대.기아차 주식까지 팔 수 밖에 없어 경영권 방어가 어려워질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글로비스 주가는 최근 주식시장이 활황세를 맞으면서 4만원대(22일 종가기준 총액 9천78억원)까지 회복했다.

하지만 이날 변호인단이 정 회장의 출연금이라고 밝힌 600억원은 글로비스 주식과는 무관한 정 회장 본인이 갖고 있던 현찰인 것으로 알려졌다.

변호인단은 증거자료로 정회장이 연내 출연키로 한 1천200억원중 600억원이 입금된 예금통장 사본과 기부증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현대차 그룹은 이에대해 "나머지 600억원의 조성방안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며 "앞으로 정 회장이 출연금을 어떻게 마련할지는 회장 개인 자격으로 결정할 문제"라고 설명했다.

◇사회공헌기금 약속..재판에 영향을 미칠까 = 변호인단은 이날 변론에서 정 회장의 사회공헌 약속 이행과 2012년 여수 세계엑스포 유치 노력, 슬로바키아 기아차공장 준공식.체코 현대차공장 착공식 등 경영활동을 강조했다.

잘못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국가적으로나 경제계를 위한 정 회장의 노력을 부각시킴으로써 '구속'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막고 1심에서 받은 '징역 3년'의 양형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전략인 셈이다.

법조계에서는 정 회장의 사회공헌 약속이 제한적이지만 구체화됐다는 점에서 일단 향후 선고에서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법조인은 "법적으로 사회에 기부를 하면 피고인의 양형이 얼마 깎인다는 규정은 없지만 재판부가 판단함에 있어 참작 사유는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삼성의 예에서 볼 수 있듯 사회단체에서는 "재벌들이 법망을 빠져나가기 위해 엄청난 돈을 내놓는 것 자체가 순수한 기부와는 거리가 멀다"는 비난도 많아 법원이 두 잣대 사이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 주목된다.

(서울연합뉴스) 유경수기자 yk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