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기름쟁이' 황두열 한국석유공사 사장이 세상 살아 온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한 7일 저녁.그는 약속시간보다 40분 정도 이른 6시20분께 한국경제신문사 편집국에 도착했다.

"좀 일찍 오셨네요"라고 인사말을 건네자 "영업맨으로 30년 이상 일하다보니 약속시간보다 먼저 오고 나중에 가는 것이 체질이 됐습니다"라며 악수를 청한다.

황 사장의 첫인상은 '시골 이장'에 가까웠다.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체구는 당당했다.내민 손은 두툼했으며 약간은 거칠었다.온화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얼굴이 편하기만 하다.

자리를 함께 하기로 한 기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 뒤 근처 작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황 사장은 반주로 주저없이 소주를 택했다.다만 술을 잘 못하는 동석자들을 위해 맥주를 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황 사장은 청탁을 가리지 않고 말술도 사양치 않는 천하의 애주가.

이날도 역시 오는 잔을 마다하질 않았다. 다만 절대 강권하는 법이 없다는 것.얼굴은 약간 붉어졌지만 자세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환갑을 훨씬 넘긴 나이에도 연하의 사람들에게 말을 놓는 법이 없다. 대화 중 부하 직원에게 전화로 몇 가지 숫자를 확인할 때도 꼬박꼬박 말을 높였다. '주선(酒仙)'들이 그렇듯,화법은 구수하고 조용했다.

하지만 직장인의 자세 등에 대해서 말할 때는 힘이 실렸다. 황 사장의 거칠 것 없는 얘기는 3시간30분이나 계속됐다. 그래도 다하지 못한 얘기가 아쉬운 듯,황 사장은 "여기 멤버 그대로 나중에 다시 한 잔 하자"고 제안했다.

▶▶▶한경 기자들과 4시간 솔직 토크

#40년 기름쟁이 인생

-남들이 부를 때 부회장님과 사장님 중 어떤 게 좋은가요(SK㈜ 사장과 부회장을 지낸 그는 2005년 11월 석유공사 사장 공모에 참여해 자리를 옮겼다).

"석유공사 사장 맡은 지 1년 반 정도 됐습니다.

이제 사장이란 호칭이 익숙합니다.

부회장이란 호칭에는 약간 거품이 들어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또 '부(副)'자가 붙으면 왠지 힘이 빠지는 느낌도 있지 않습니까(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한번 웃으며 원하는 사람에게 소주잔을 채워줬다).사장이 좋습니다."

-첫 직장이 석유공사이던데 그럼 컴백하신 겁니까.

"아닙니다.첫 직장은 대한석유공사이고 지금은 한국석유공사지요. 다른 회사입니다.

제가 ROTC 장교 마치고 1968년 입사했을 때 대한석유공사는 석유를 독점 판매하던 회사였습니다.

이 회사가 1980년 선경그룹에 인수돼 유공으로 이름을 바꿨고,선경그룹이 1990년대 초반 CI(기업이미지) 작업을 하면서 SK주식회사가 된 것이지요.

재미있는 것은 저 자신은 가만있는데 회사 이름과 대주주가 각각 세 차례나 바뀌었다는 겁니다.

이름은 아까 설명드렸고 대주주는 정부에서 걸프오일코퍼레이션(지금은 셰브론에 흡수합병됐음),다시 SK그룹으로 변경됐지요.

지금 제가 있는 한국석유공사는 해외 유전개발과 비축사업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으로 1979년 설립된 회사입니다.

그러니까 컴백한 것이 아니고 새로 입사한 거지요."

-대한석유공사의 대우는 어땠나요.

"상당히 좋은 편이었습니다.(혼잣말로 '가만보자'고 한 뒤) 급여로 봤을 때 당시엔 한국화약이나 OB맥주 등이 톱클래스였고요.

삼성물산 럭키 대한석유공사가 다음이었지요.

대졸 초임이 2만4000원이었는데 장교 시절 1만1500원에 비하면 두 배 이상 많았지요.

하숙비 7000원 내고도 상당히 남았습니다.

그런데 늘 쪼달렸습니다. 한 달에 20일을 술을 먹었으니까요. 세상에 술값 대주는 회사는 없지 않습니까. 허허."


#영업에 눈뜬 초등학교 5학년

-(모두가 잔을 부딪친 뒤 화제는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유년 시절은 어땠나요.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경주와 울산에서 이런저런 사업을 하셨어요.

양화점도 하셨고 서점도 하셨어요.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울산에서 청과상을 하셨습니다.

과일가게죠.도매도 하고 소매도 하고.저는 학교 끝나고 장사하는 것 도와드렸습니다.

그때부터 중학 3학년 때까지 아버님을 도왔으니 한 5년 되나요.

(즐거운 목소리로) 그때 영업맨 기초를 다졌죠.제 영업맨 30년은 사실 이때 시작된 것입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어떤 학생이었습니까.

"중학교는 울산중을 지원했습니다.

당시 공부 잘하던 학생들은 대부분 울산제일을 갔지요.

울산제일은 공립이고 남학교였죠.울산중은 사립이고 여학생이 여섯 반,남학생 두 반이었습니다."

-왜 거길 지원하셨습니까.

"입학 시험 쳐서 1~3등까지는 입학금을 면제해 준다고 해서요.

그거라도 아끼면 집에 보탬이 될까 생각했습니다.

저희 형제가 7남매여서 아버지께서 다소 힘들어하신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엔 월사금을 두 달치 못 내면 수업에 못 들어가고 복도에 서 있어야 했지요.

세 달치를 못 내면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했고요.

저도 그런 경험 있습니다. 하지만 입학금을 면제받으려고 입학한 것을 지금은 후회합니다. 나중에 완전히 여학교로 바뀌었거든요. 지금 울산학성여중입니다."

-고등학교를 상고로 가신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인가요.

"그런 셈이지요. 당시 울산엔 울산농고와 사립 울산고가 있었는데 농고는 제 적성에 전혀 맞지 않은 것 같고,울산고는 사립이어서….상고 나오면 사회에 빨리 진출할 수도 있고요.

울산에서 가장 가까운 상고가 부산상고여서 그리로 갔습니다.

부산상고가 시험성적 우수학생에게 장학금도 준다고 해서요."

-중·고등학교 시절 수재였을 것 같은데요.

"(손을 저으며) 천만에요.중학교 때도 1등을 못했어요. 2등 해서 입학금은 면제받긴 했죠.부산상고 들어갈 때 장학금 못 받았습니다.

그냥 공부 열심히 하는 상위권 학생이었어요.

고등학교 졸업 무렵 괜찮은 데 취직하려고 하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진학으로 바꿨죠."

#상고ㆍ상대ㆍ경리장교 "또 경리를 하라고요?"

-대학은 서울로 오실 생각을 안 하셨나요.

"왜 안 했겠습니까.근데 실력이 좀 모자랐나 봐요.

1960년대 초반엔 '동일계열 무시험제도'라는 게 있었습니다.

농고 출신 학생은 시험 안 보고 농대에,상고 출신은 무시험으로 상대에 진학하는 겁니다.

대학마다 일정 비율로 뽑았죠.그래서 상고 출신인 저는 서울대 상대를 1지망,고대 상대를 2지망,부산대 상대를 3지망으로 냈는데 1·2지망에서 탈락했습니다.

다행히 부산대엔 붙었지요.

동일계열 무시험제도가 없었으면 아마 대학 못 갔을 겁니다(이때 한쪽에서 '너무 겸손하신 것 아닙니까'라는 비난(?)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는 졸업 당시 열손가락 안에 든 우수학생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아신 지가 오래됐나요(노 대통령은 황 사장의 부산상고 4년 후배다).

"노 대통령과는 고등학교를 다닌 기간이 달라 몰랐습니다.

제가 노 대통령을 안 것은 청문회 스타로 뜬 뒤였지요.

1990년대 초일 겁니다.SK㈜ 사무실이 여의도에 있고 노 대통령도 여의도에 계셔서 그때 처음 만났습니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도 만난 지 얼마 안됐고요.

동문회에 회비는 꼬박꼬박 내는데… 참석은 잘 못했어요."

-대한석유공사 SK㈜에 근무한 37년을 대부분 영업에서 보내셨는데요.

"군대에서 경리장교했다는 말씀을 먼저 드려야겠네요. 대한석유공사에 입사하니까 관리과로 보내더라구요. 회계 서무 이런 일이죠. 상고 상대 경리장교를 했으니 제격이라고 판단했겠지요. 그런데 저는 장교시절 경리가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사회에 나가서 이 일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죠. 경리장교를 하면 돈 빌리러 오는 군인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공금이 금고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오지만 그렇다고 빌려줄 수는 없고…. 상당히 난처했습니다.

그리고 메인스트림(main streamㆍ주류)에 있지 않으면 한계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기업활동의 꽃은 현장을 누비는 영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업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죠. 안 바꿔주면 안 다닐 거라고 얘기했습니다. 젊으니까 배짱이 두둑했지요. 여기 아니라도 갈 데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목소리에 다소 힘이 실렸다) 회사에서 결국 영업으로 발령을 냈죠."


#CEO가 된 비결? "죽을 힘을 다해 일했을 뿐"

-당시 회사가 공기업에다 독점이니 일은 편했겠네요.

"처음엔 그랬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석유 판매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배급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좋은 시절이 끝났습니다. 호남정유(현 GS칼텍스)가 시장에 들어온 겁니다. 호남정유는 신생에다 민간이니 마케팅을 참 나긋나긋하게 잘 했습니다. 뻣뻣한 대한석유공사와는 달랐죠.

때문에 우리 회사 시장점유율이 계속 곤두박질치는 겁니다. 자고 일어나면 1%포인트씩 줄어들었어요. 어떤 날엔 3%포인트가 떨어지기도 하더군요. 1년 만에 점유율이 100%에서 65%로 추락했습니다. 그래서 밤낮으로 뛰어다녔죠. 주유소를 찾아가 '우리도 달라지고 있다'고 얘기하면서요. 어떤 회사는 '대한석유공사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내걸기도 했지요. 거기를 무작정 찾아가 '이제 개과천선했다'고 하소연하기도 했지요. (일제히 웃음) 다행히 이후엔 점유율 하락을 막아냈습니다."

-술은 그 때 많이 드셨나요.

"지금도 그런 경향이 남아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영업하면 술을 빼 놓을 수 없었습니다. 주량은 소주 한 병 반에서 두 병 정도인데 죽기 살기로 마셨습니다. 36세 때 병원에서 우연히 진단을 받았는데 의사가 위궤양이 심각하다고 진단했습니다. 직업이 뭐냐고 묻길래 영업맨이라 했더니 바로 위절제 수술을 하데요. 수술 후엔 하루에 소량을 여섯 끼 먹으라고 처방 내렸습니다. 석 달 정도 의사 말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회사 일이 어디 그렇습니까. 하루에 여섯 끼를 먹을라 치면 밥만 먹다가 회사 일 끝나지 않겠어요. 고민 끝에 밥은 정량대로 세끼만 먹고 술도 예전처럼 먹자고 결심했습니다. 접대를 하다보면 소주 6~7병을 마시기가 일쑤였지요. 그래도 술 자리에서 취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습니다. 집에 도착하면 완전히 곯아떨어지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담배는 고등학교 졸업하는 날 피우기 시작해서 40년간 하루 두 갑씩 피우다가 5년 전 그만뒀습니다."

-승진은 빨리 하신 편인가요.

"운이 좋았습니다. 대주주인 걸프 오일이 경쟁체제로 바뀐 한국의 시장상황을 보고 기존 영업맨들로는 도무지 안되겠다고 판단했는가 봅니다. 그래서 입사 2년반 만에 과장으로 승진할 수 있었지요. 과장은 영어로 manager가 아니고 supervisor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입니다. 이후에도 사무소장 부장 이사 상무 전무까지 착착 올라갔지요. 2001년 3월에 대표이사 부회장이 됐습니다. 부회장까지 된 것은 운칠기삼(運七技三)이었습니다. 공기업인 한국석유공사 사장까지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요."

-멘토(mentorㆍ스승)라면 어떤 분들이 계셨습니까

"딱히 누구를 역할모델로 삼지는 않고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장점을 취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특히 직장 초년병 시절 두 분에게서 많이 배웠습니다. 먼저 첫 출근하자 모신 김지현 영업소장입니다. 그 분은 심계원(현 감사원) 고시를 패스하고 한국은행 시험에도 합격한 수재였습니다. 제가 기안서를 올릴 때는 한 줄 쓰고 한 줄 떼고 해서 그 분께 제출했습니다. 그 분은 빈 줄에다가 깨알같이 써서 고쳐 주셨습니다. 빈틈없고 야무진 일처리를 그때 배웠습니다.

후임 이기형 영업소장으로부터는 투명성을 배웠습니다. 그 분은 걸프 오일에서 파견된 분이었습니다. 하루는 그 분이 커피 한잔 마시자고 해서 마시고 제가 계산했습니다. 그리고 4층까지 올라가는데 내내 왜 당신이 계산했느냐고 따졌습니다. 소장님이 초대했고 내가 응했는데 예의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 월급이 얼마고 당신 월급이 얼만인데 조목조목 얘기하면서 커피값을 주시더군요. 그래서 받으니까 다방에 가서 영수증을 떼 오라고 하셨죠. 두 분의 가르침은 지금껏 제가 지키고자 하는 덕목입니다."


#자원부국을 향해 석유공사 대형화에 '올인'


-공기업에 와 보시니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공기업으론 한국석유공사밖에 모릅니다만 밖에서 보는 공기업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정리정돈이 잘 돼 있으며 밖에서 생각하는 만큼 비난받을 일은 없다고 봅니다. 약점이라면 절차가 복잡하고 의사결정이 늦다는 데 있습니다. 공기업 특성상 관리감독이 불가피하고… 보상체계도 민간기업과는 차이가 있고…. 그런데 저는 직원들에게 보상체계와 관련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얘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먼저 성취하면 보상은 따라오게 돼 있습니다."

-석유공사 민영화 얘기가 있었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일단 지금은 시기가 아니라고 봅니다. 앞으로 한 10년간은 국영기업으로 놔 두고 규모를 훨씬 더 키워야 합니다. 현재 자원부국은 자원개발을 국영기업이 담당합니다. 그런데 국영기업은 민간기업보다는 국영기업끼리 대화하길 원합니다. 민간이 요구하는 효율성 문제는 견제와 감시 체제를 잘 갖추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석유공사 직원들은 자원개발 분야에서 국내 최고입니다. 제가 SK㈜에 있을 때도 인정한 사실입니다. 규모를 키우고 국제적 전문가를 육성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뭡니까.

"여러가지를 병행하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학창시절엔 철학교수가 되어 보고도 싶었는데 안 됐고요. 고등학교 땐 한 손엔 주판,다른 손엔 미학 논리학 인식론 책을 끼고 다녔었죠. 업무 탓에 가정생활에 충실하지 못했던 점도 마음에 걸립니다. 지금까지 주례를 어쩔 수 없이 한 번밖에 서지 않았던 것은 가족들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저 스스로가 부끄러웠기 때문이지요. 아내에게는 미안할 뿐입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수시로 함께 술을 마시던 동료들과 집에 몰려가도 잔소리 한 번 안 하고 술국을 내오던 아내입니다. 제가 CEO까지 오르게 된 데는 아내의 역할이 절반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박준동/정인설/사진=허문찬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