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京俊 < 딜로이트컨설팅 파트너 >

세계 모델시장은 전통적으로 북미·서유럽 출신 백인들의 독무대였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신규로 시장에 진입한 러시아와 동유럽 출신 모델들은 키가 크고 어깨가 좁은 체형이라 디자이너들이 선호해 기존시장을 급속히 잠식했다.

여기에 인터넷의 발달은 모델시장을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시켰다. 지구촌 어디서나 모델 지망생은 인터넷을 통해 자신을 패션 중심지인 뉴욕과 파리의 일류 디자이너에게 선보일 수 있게 되었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프로필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만으로 데뷔는 가능하다.

글로벌 모델업계의 대표적인 사이트인 '모델스닷컴'에는 매달 1만명 이상의 새로운 프로필이 올라오고 있다. 지난 3월 말 '금주의 여성 신인'으로 뽑힌 리타(Rita)는 러시아에서도 오지(奧地)인 시베리아의 노보시비르스크에 살고 있는 10대 소녀다.

모델 시장의 글로벌 통합이 기존의 북미,서유럽 출신에게는 위협이지만,다른 지역 모델에게는 큰 기회를 준다. 아시아 명품시장 성장으로 동양인 모델 수요가 늘어나는 가운데 우리나라 모델의 세계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글로벌 랭킹 상위권에 드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이처럼 글로벌화란 일방적인 위협도,일방적인 기회도 아닐 뿐더러 거부한다고 거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이 그렇게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개방성과 독자성이란 인류 사회를 관통해 온 화두다. 개인도 외향성이 지나치면 사교적이지만 줏대가 없기 쉽고,지나치게 내향적이면 개성은 있어도 고집불통이 된다. 사회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개방성이 과다하면 민족성과 자주성이 훼손되기 쉽고,독자성이 과다하면 폐쇄적이고 배타적이 된다. 개방성과 독자성을 흑백논리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합리적 균형을 잡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공동체 번영의 조건이라는 점을 역사와 경험은 웅변(雄辯)하고 있다.

19세기 중반 개방의 세계사적 흐름에 올라타지 못했던 우리나라에서 '위정척사'의 애국심은 드높았지만 그 대가(代價)는 공동체의 파멸이었다. 당시의 실력자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신미양요'라는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개방의 시대정신을 읽어내고 대처하는 전쟁에서는 졌다. 외세에 저항해 대마도로 끌려가 순국했던 최익현의 기상은 드높았지만 미래를 내다보는 국가전략의 비전은 부재했다. 오늘날 글로벌 경제시대 개방화의 흐름을 거역하면서 FTA를 정치적 흥행에까지 활용하고 있는 일부 정치인들의 모습에서 100년 전 조선을 망국으로 몰아간 퇴영적인 지도자들의 과오가 겹쳐져 느껴진다.

GATT,WTO체제의 수혜자였던 우리나라는 FTA를 통해 개방의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다. FTA는 지난 50년간 우리가 거둔 성공을 지속시키기 위한 국가적 도약의 계기다.

FTA를 '유리와 불리'의 경제적 실리적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고 '정의와 불의'라는 정치적 선동과 민족 자존심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우리의 성공 경험을 부정하고 시대변화를 외면하는 것이다.

한·미 FTA는 미국이라는 거대시장을 주변 강대국인 일본,중국보다 한 발 앞서서 우리의 내수시장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다. 20세기 후반 냉전시대,우리나라 경제발전의 동력은 민족주의에서 힘입은 바 크지만,21세기 글로벌 경제 환경에서 도약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개방의 시대정신이다.

뉴욕과 파리의 아름다운 패션모델들이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은 글로벌 차원의 모델시장 통합에 원인이 있다. 경제통합과 정보기술의 발달로 세계가 평평하게 변해가는 글로벌 시대에서,한·미 FTA 체결은 종착점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점이다.

나아가 중국 일본 EU 국가와의 FTA 체결도 장기국가 전략하에서 냉정하게 따져보고 적극 모색해야 한다. 공동체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소모적 논쟁보다는 새로운 환경에서 생겨나는 기회를 활용해 번영하기 위한 방향설정에 구성원 전체가 힘을 모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