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구걸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

디지털 구걸이란 간단한 디지털 상품이나 서비스를 공짜로 얻어 즐기려는 세태를 말한다.

돈주고 사기는 아깝거나 귀찮고,돈이 있어도 디지털 맹(盲)이어서 구매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들에 속한다.

최근에는 꽤 값이 나가는 제품까지 거저 달라고 동냥하는 사람까지 생겨 가격불문 양상마저 띠고 있다.

각종 제품과 서비스가 넘쳐나는 '디지털적 풍요'가 빚어내는 현상이라고 보면 정확할 듯하다.

디지털 구걸족이 요구하는(?) 것은 미니홈피 배경음악,휴대폰 컬러링,게임아이템,마우스,휴대폰 충전기,USB,MP3,휴대폰 등을 망라한다.

이들은 여러 개의 커뮤니티에 가입해 넓혀놓은 인맥을 이용하거나,기업의 판촉마케팅기간을 활용하거나,선·후배 관계를 앞세워 공짜로 디지털 수요를 채운다.

'창피는 순간이지만 이익은 영원하다'는 게 디지털 구걸족의 행동모토라고나 할까.


직장인 김지영씨(27·가명)는 자신은 디지털구걸의 희생양이라며 웃는다.

지난주 금요일 오후 사무실에 앉아 있던 그녀는 기분전환도 할 겸 모아두었던 도토리로 미니홈피 배경음악을 '쿤타 인 뉴올리언스'의 '마마'로 바꿨다.

흥겨운 레게풍 음악으로 듣는 이를 신나게 한다.

배경음악을 바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방명록에 학교 선배의 댓글이 달렸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너무 좋다.

BGM(배경음악)으로 선물해달라"고 쓰여 있었다.

김씨는 하는 수 없이 도토리 5개(500원)를 써서 '마마'를 적선했다.

김씨는 "처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해줬는데,많이 해주다보니 전문 구걸족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음악 무료 다운로드가 가능한 불법 시장이 사라져 가면서 인터넷 상에서는 미니홈피 배경음악이나 컬러링 등 휴대폰 음악 콘텐츠를 구걸하는 네티즌들이 느는 추세다.

이들은 주위 지인들에게 집요하게 자신이 듣고 싶은 음악이나 디지털 아이템 선물을 요구한다.

이들 중에는 디지털 트렌드에 뒤처진 '무지형'이 많다.

대학에서 교직원으로 근무하는 신지영씨(26)는 컬러링을 바꿀 때면 옆자리 상사가 신경쓰인다. 어느 순간 나타나서 자신의 휴대폰 컬러링도 좀 바꿔달라며 요구해오기 때문이다. 온라인 사이트에 직접 가입해서 컬러링을 다운받는 방법을 알려줘도 언제나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아이템 선물을 부탁한다.

선물해준 뒤 돈을 받기도 찜찜하다.

1000원 이하의 음악 아이템을 가지고 째째하게 그런다는 말을 들을까봐서다.

"담배는 안 사고 매번 한 개비씩 얻어 피는 남자들 있잖아.꼭 그래요"라는 게 신씨의 말이다.

상사는 컬러링뿐 아니라 출퇴근 시간에 들을 만한 노래가 뭐냐며 휴대폰에 음악 몇 곡을 넣어달라는 부탁도 추가한다. '무지형'은 주로 상사나 선배들이 부하직원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공개구걸형'도 있다. 구할 수 없는 희귀 파일들을 인터넷에서 공개적으로 구걸하는 경우다. 이들은 일반 음원사이트에서 구할 수 없는 음악파일을 네이버 지식인이나 음악 커뮤니티 등을 돌아다니면서 구걸한다.

다음(daum) 사이트에 개설된 한 인디음악카페에는 공지란에 아예 '운영진에게 구걸 금지'라는 글이 올라와 있다. 특히 신인가수들의 미니홈피 방명록에는 BGM이나 새로 발표한 음반의 음악들을 선물해달라는 글들이 올라오기도 한다. 신인가수들의 경우 자신의 음악을 홍보하는 차원에서 BGM 구걸 시 잘 응해주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1집을 발표한 신인그룹 벨벳글로브의 경우도 미니홈피에 'CD를 사고 싶은데 절판됐다'며 음악파일을 선물해 달라거나,미니홈피 배경음악으로 설정하고 싶다고 BGM을 조르는 내용이 종종 올라온다.

돈이 없는 10대들에게 디지털 구걸은 일상적이다. 고교 2학년인 윤성역군(15)은 미니홈피 배경음악이나 게임 아이템 등을 인터넷 상의 지인들을 통해 구걸로 얻어왔다. 그는 포털 사이트마다 여러 개의 커뮤니티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으며,학교나 학원 친구들도 미니홈피 지인들로 등록돼 있어 디지털 인맥을 활용하면 디지털 배고픔을 채울 수 있다고 말한다.

오프라인과 달리 디지털 세상에서 이처럼 구걸 행위가 자연스럽게 된 것은 인터넷에서 구입할 수 있는 유료 콘텐츠나 스킨 등의 아이템 가격이 1000원 내외로 구걸하는 입장이나 그냥 주는 입장에서나 가격에 대한 부담이 적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10대 시절의 디지털 구걸이 습관화돼 온라인 콘텐츠를 정상적으로 구입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면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요즘은 USB나 휴대폰을 달라는 고급 구걸족도 있다.

전자회사에 다니거나 이동통신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들이 자주 당하는 구걸이다.

A통신회사에 다니는 L씨.그는 요즘 이런저런 친구 등으로부터 구걸 같은 부탁을 받는다.

특히 회사가 새로운 서비스를 내놓을 때마다 휴대폰을 바꿔줄 수 없냐며 성화다.

이들은 "인터넷에 들어가면 1000원하는 휴대폰이 있더라"며 "귀찮으니 알아서 좀 바꿔달라"고 한다.

이들 중에는 번호를 이동하는 정도의 대가를 지불해 공짜폰을 얻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이 시장에 나가기 귀찮아 하는 사례들이다.

USB는 구걸의 대표적인 품목이다.

2~3년 전만 해도 USB는 귀한 저장장치였다.

하지만 요즘은 발에 차이는 게 USB라고 할 정도로 흔해지면서 공짜로 얻어쓰는 풍토가 확산돼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 USB가 구걸품목이 됐다.

요즘은 1GB(기가바이트)나 2GB짜리를 주지 않으면 구걸족이 도리어 화를 낸다.

마우스도 마찬가지다.

선이 있는 마우스보다 무선마우스를 달라는 구걸족이 많이 생기고 있다.

MP3도 비슷한 추세다.

이를 두고 업계 일각에서는 '풍부한 디지털 인심'이라고 보기도 한다.

디지털 기기와 서비스가 더욱 풍요해지는 미래세계에는 어떤 디지털 구걸(Digital Begger)이 생길지 지켜볼 일이다.

고기완 기자 dad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