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14년차인 김 과장(40) 가족의 월수입은 학원 강사인 아내의 월급 200만원을 합쳐 450만원이다.

300만원의 분기 보너스를 합치면 월평균 550만원 소득은 된다.

맞벌이라 소득이 적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신혼 초 가입한 월 30만원의 종신 보험을 빼면 별도의 저축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지난해 32평짜리 아파트를 마련하면서 받은 은행 대출 이자(150만원)와 초등학교 다니는 두 아이의 학원비(140만원) 부담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사는 데 크게 불편하지는 않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하기 짝이 없다.

가계에 '빨간불'이 켜졌다.

한때 세계 최고 수준이던 가계 저축률이 지난해 3.5%까지 떨어졌다.

당장은 기업들의 현금 보유가 풍부해 생산 자금이 부족한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가계 저축률 하락은 가계의 파산 가능성과 함께 장기적으로 경제의 성장 동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변수라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저축률 왜 떨어지나

저축률이 급락하고 있는 이유는 소득 증가율은 크게 둔화된 반면 씀씀이가 커졌기 때문이다.

지출이 많아 저축할 여력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얘기다.

저축률 하락은 순처분 가능소득에 비해 소비 지출이 더 빠르게 늘었다는 뜻이다.

순처분 가능소득은 외환위기 이후 10년(1997~2006년)간 연평균 5.5% 늘어나는 데 그쳤다.

이전 10년간(1987~1996년)의 연평균 증가율 16.1%에 비하면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소득 증가세가 정체된 이유는 기본적으로 경제성장률이 둔화됐기 때문이다.

소득 증가는 더딘데 소비 지출은 상대적으로 빠르게 늘고 있다.

소비 지출은 외환위기 이후 연평균 6.9% 증가해 소득 증가율(4.2%)을 앞질렀다.

일반 소비지출 규모도 커졌지만 세금 사교육비 통신료 의료보건비 등 각종 지출 규모가 빠르게 커지면서 저축의 여지를 좁혀놓고 있다.

2000년과 비교해 통신비 지출은 52% 늘었고 의료보건비(49%) 교육비(21%) 등도 급증했다.

무리하게 빚을 내서 집을 산 뒤 벌어서 이를 메워 나가는 식으로 주택 마련 패턴이 바뀐 것도 저축률 하락의 한 요인으로 분석된다.

금리가 급격히 떨어진 것이 이런 분위기를 부추겼다.


◆저축률도 양극화 심화

저축률 하락에는 집값 등 자산가치 상승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임금에 비해 자산 소득이 더 많이 증가하면 저축 의욕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또 자산 효과에 의해 소비도 늘게 된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씀씀이가 헤퍼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가계부채 규모가 지나치게 늘어난 데다 소득과 저축의 양극화로 저소득층 가계의 취약성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6월 말 기준으로 금융자산 대비 금융부채 비율은 44.3%로 미국(32%) 일본(26%) 등 주요국에 비해 현저하게 높은 수준이다.

가계의 가용 소득을 통한 금융부채 상환 능력을 나타내는 개인 가처분소득 대비 금융부채 비율도 2000년 처음으로 100%를 넘어섰고 지난해엔 136%까지 높아졌다.

가계의 채무부담 능력이 그만큼 악화됐다는 얘기다.

이 같은 부채는 대부분 중산층 이하 서민들이 짊어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인 이상 도시근로자 가계 기준으로 상위 20% 고소득 계층의 저축률은 32%(2006년)에 이른다.

외환위기 이후에도 큰 변화가 없다.

그러나 하위 20%의 저축률은 -5%에서 -17%로 급감했다.

통장을 헐었건 빚을 냈건 번 것보다 쓴 것이 17%나 많았다는 것이다.


◆경제 악순환 우려

전문가들은 개인 저축률이 떨어지면 '유동성 위기론'이 불거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거시 경제 차원에서 외화 자금이 부족해서 발생하는 '매크로 유동성 위기(macro crisis)'는 아니지만 개인 기업 등 개별 경제 주체의 현금흐름 상에 문제가 생기는 유동성 위기(micro crisis)가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저소득층 중심으로 가계 저축률이 계속 낮아지면 가계 파산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이 닥치면 소비 회복이 어려워지고 기업 투자가 위축돼 경제 성장이 둔화되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또 가계 파산이 늘면 금융회사도 타격을 입게 된다.

삼성경제연구소 황상연 박사는 "빚이 많고 저축이 없으면 소득이 갑자기 줄어들거나 금리가 급등하는 등의 변수가 생겼을 때 완충 작용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소비가 급격히 위축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박종규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저축률이 높아지려면 근본적으로는 기업의 투자가 살아나 성장을 통한 고용 창출과 소득 증대가 이뤄져야 하지만 국민들도 소득 수준에 맞는 내핍과 절약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박성완 기자 ps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