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들의 세상사는 이야기] 신훈 부회장 "대학땐 학원차려 학비도 벌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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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 기자들과 6시간 人生토크
< '디지털CEO' 신훈 금호아시아나그룹 건설부분 부회장 >
'IT 지식으로 무장한 디지털 CEO.' 신훈 금호아시아나그룹 건설부문 부회장(62)을 설명할 때면 빠지지 않고 항상 따라붙는 수식어다.
신 부회장과 일면식이 없는 사람은 그의 화려한 이력만 보고 차가운 사람이라는 인상을 가질지 모르지만,실제 그는 구수한 된장찌개같이 소박하고 인간적이다.
연간 매출액이 7조원을 넘는 대우건설과 금호건설을 함께 끌어가는 총사령관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새삼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노력 없는 대가는 없는 법.중저음의 바리톤 목소리로 풀어 놓는 신 부회장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듣다 보면 지금의 자리는 도전하고 경쟁하며 고비를 넘겼던 치열한 삶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이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지난달 26일 세종문화회관 뒤쪽 한정식 집에서 6시간 넘게 이어진 신 부회장과의 정담은 진지한 한 편의 다큐멘터리 같은 짙은 여운을 남겼다.
# 베트남 정도는 무박으로 출장
-대우건설을 인수해 국내 최대 건설업체의 최고경영자(CEO)가 되셨는데 어떻게 지내십니까?
"지난 한 달 사이에만 베트남,중동,아프리카를 거쳐 미국까지 갔다왔다 했어요.말 그대로 하늘에 붕 떠 있는 느낌이랄까요.하루에 한 번씩 시차가 바뀌더라고요(웃음). 베트남 같은 경우는 무박2일,무박3일로 다녀와요."
-건강에 신경을 쓰셔야겠습니다.
"운동이 최고죠.시간을 일부러 내서라도 운동을 해요.해외에 나가면 호텔 피트니스센터에서 매일 러닝머신으로 1시간 정도씩 정기적으로 운동을 합니다.국내에서는 아무리 늦게까지 술을 먹어도 집에 들어가서는 반드시 1시간 이상 자전거를 탑니다.잠은 5시간 이상 안 자요. 밤 12시나 새벽 1시 사이에 자고 오전 5시30분에 기상한 뒤 7시20분이면 출근해요. 습관이 몇 십년간 몸에 배니까 오히려 편해요."
-주량이 맥주 1병이라던데요.
"술이란 게 먹으면 늘더라고요. 건설업계에 오기 전만 해도 치사량은 맥주 2잔이었는데 요즘은 폭탄주 5~6잔까지 마셔요. 폭탄주를 먹다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몇 번 있긴 하지만.한때는 모임 때마다 박삼구 회장께서 거꾸로 제 술을 대신 마셔주신 적도 있어요. 아버지,형제들 모두 술을 입에 못 댑니다. 집안 내력이죠.술자리에서 날 배려해주면 골프칠 때 대신 핸디를 줍니다(좌중 웃음)."
-어렸을 때 공부 잘 하셨죠?
"1등을 빼앗겨 본 적이 없지요. 전남 장흥에서 5학년 1학기까지 다니다 광주로 유학왔어요. 광주 서석초등학교로 전학갔는데 시골에서 왔다고 얼마나 차별이 심하던지.성적 순으로 1~6분단까지 나누는데 전학 한 달 만에 1분단으로 갔어요. 졸업할 때는 전교대표로 졸업장도 받았죠."
# 고교때 전국 수학경시대회 1등
-대학은 수학과를 가셨네요.
"4남1녀 중에 넷째였는데 큰형님이 의대에 가셨어요. 구청 공무원인 아버지한테는 형님 학비만 해도 빠듯했죠.그러니 나머지 형제들은 대학에 갈 형편이 안 됐어요. 고등학교 졸업 무렵 경희대에서 전국 고교학력경시대회를 열었는데 학교대표로 나가 수학 부문 전국 1등을 했어요. 1등한테 원하는 학과에 4년간 무료 장학금을 준다기에 경영학과에 들어갔죠.그런데 적성이 안 맞아서 1년 뒤에 서울 사범대학 수학과에 다시 들어갔어요. 학비가 싸서 부담이 많지 않았어요. 그때 커트라인이 의대와 같았죠."
-수학을 좋아하셨나 봐요.
"고1 때 수학선생님이 굉장히 엄했어요. 어느 날은 어려운 문제 하나를 칠판에 써놓고 번호대로 한 사람씩 나와서 풀게 하는데 내 번호 앞까지 아무도 못 풀더군요. 2차함수 근의 공식을 구하는 증명이었는데 내가 수업이 끝나는 종이 칠 때까지 45분간 풀었죠.선생님도 놀라더라고요. 인정을 받으니까 더 열심히 했죠.그 수학선생님 때문에 수학에 빠져들었어요."
-대학 때는 사업도 하셨다고 하던데요.
"당시 모 신문사에서 지방 고학생들을 위해 두 줄짜리 광고를 공짜로 내주곤 했어요. 그래서 '전국 수학경시대회 1위,서울대 사대수학과' 이렇게 딱 두 줄 광고를 냈는데 전화에 불이 나더군요. 그 중에 조건이 좋은 곳을 골라서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갔죠.그리고 20명을 모아서 사설 수학학원을 하나 차렸어요. 서울 돈암동 다락방을 하나 빌려서 학원을 운영했는데 그때 월수입이 20만~30만원이었어요. 대기업 초임 월급이 2만원일 때니까 엄청난 고소득자였던 셈이죠."
# 대한항공 전산직 공채 1기로 출발
-첫 직장이 대한항공이었죠?
"졸업하고 컴퓨터학원 강사로 있는데 마침 대한항공하고 금성사에서 전산직 공채를 하더군요. 항공사 일이 좀 더 전망 있어 보여서 대한항공을 선택했죠.전산직 공채 1기였는데 내가 할 일은 온라인 프로그램 개발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항공 예약 시스템이란 게 직원들이 일일이 손으로 적고 지우는 원시적인 형태였습니다. 당시 조중훈 회장께서 나에게 온라인 프로그램 개발이라는 특명을 맡겨 입사 1년 만에 캐나다 시스템 업체로 유학을 떠났어요."
-개발은 잘 됐나요.
"캐나다에 처음 가니까 미개국가에서 왔다고 연구에 끼어 주지도 않고 엄청 무시하더라고요. 밴쿠버에 한국 교민이 4명인가 있던 때였거든요. 어느 날 연구실 컴퓨터가 고장 나서 애를 먹었는데 내가 나서서 고치니까 그때부터 인정해 주더군요. 매일 밤마다 프로그램 관련 책과 매뉴얼을 몰래 카피해서 호텔에서 새벽까지 열심히 공부했죠.얼마 뒤 국내에 돌아와서 전산팀 주도로 2년6개월 만에 전 업무에 온라인을 적용했어요. 전 세계 항공사들이 깜짝 놀랐죠."
-대한항공 이후 몇 번 직장을 옮기셨네요.
"내 사주팔자에 직장 역마살이 있나 봐요 (웃음). 대한항공에 11년 있으니까 좀 근질근질거리더라고요. 몸이 편할 만하면 남이 안 해본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보자는 생각이 자꾸 들었어요. 마침 삼환기업이라는 건설업체가 중동에 막 진출할 때인데 공정관리를 컴퓨터로 해야 한다고 나보고 좀 와 달라고 하더군요. 그때 건설업계 업무를 좀 파악했지요. 몇 년 지나니까 전 경제부총리인 이헌재씨가 날 한국신용평가로 부르더라고요. 기업평가를 위한 과거 20년간 재무제표를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일이었죠.그러다 1988년 아시아나항공 출범에 맞춰 스카우트돼 금호아시아나그룹과 인연을 맺었어요."
# 아시아나서 가정예약 시스템 첫 개발
-아시아나항공 근무 당시 얘기 좀 해주세요.
"업계 처음으로 온라인 예약 시스템을 만든 게 가장 기억 나요.후발주자인 아시아나항공이 대한항공과 경쟁하려면 기존 영업방식으로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가정 예약 시스템이었어요.마침 하이텔,천리안 등 통신망이 깔리는 등 딱 환경이 맞아떨어졌거든요.통신망 접속을 통해서 가정에서 항공권을 예약할 수 있는 온라인 마케팅을 처음 선보인 거죠.온라인 시장을 선점하고 대한항공과 차별화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계기였어요."
-IT와 뗄 수 없는 삶이시네요.
"맞아요.내 인생에서 수학과 IT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어요.지금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니까.특히 아시아나항공 CIO(최고정보관리책임자) 경험이 큰 재산이 됐어요.각 프로세스를 분석하고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바로 회사 경영과도 직결되기 때문이죠.어떤 문제를 대할 때 해결 방안을 도출하는 속도도 빨라지고요.맹목적인 목표가 아닌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직원들을 설득하니까 직원들도 더 믿고 따르는 것 같아요."
-그룹에서 건설부문은 어떻게 맡으셨습니까.
"그룹에서 2002년 1월부터 갑자기 건설을 맡기더군요.워크아웃 직전까지 몰렸던 업체라 회사 상황이 말이 아니었죠.은행 부채만 8000억원이 넘었으니까요.CEO를 맡고 처음 찾아간 곳이 모 은행장인 학교 선배였어요.2000억원만 도와 달라고 하니까 부도날 회사를 어떻게 지원하느냐고 일언지하에 거절하더라고요.제2금융권을 돌아다니며 긴급 자금을 지원받아 겨우겨우 운영했지요.돌이켜 보면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잘 따라와 준 직원들이 고마워요."
# 직원들과는 '눈높이 대화'
-직원들과의 교감을 중시하신다고요.
"직원들에게는 기본적으로 감성적 접근이 필요해요.직원들은 20대부터 60대까지 있으니까 그에 맞춘 교감 방법이 필요하죠.대학생이 초등학생하고 대화를 하려면 대학생이 초등학교 수준에 맞추는 수밖에 없잖아요.젊은 직원들과 서로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서로 교감을 쌓는 일도 경영의 주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회사가 어려웠을 때도 직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매년 봉급 인상과 진급을 약속했죠.직원들의 감동을 이끌어내고 의욕을 갖게 해주는 것 또한 CEO의 주요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성공비결을 꼽으신다면.
"집념과 도전정신입니다.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내 좌우명이 된 문구가 있어요. '청년아 불평을 하지 말고 울지를 말어라.노력 인내야말로 쓰라린 인생을 광명으로 이끄는 참된 안내자다.살아서 굴욕과 천대와 멸시를 받음보다는 차라리 분투 중에 쓰러짐을 택하라.' 좌절을 두려워하지 말고 집념을 갖고 싸워 부딪치면 좋은 결과가 따라옵니다."
-자녀 교육은 어떻게 하셨나요.
"딸 하나 아들 하나 있는데 무난하게 잘 자라줬어요.조금 손해를 보는 일이 있더라도 항상 상대방에게 양보하는 미덕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죠.이런 가르침을 잘 따라준 것 같아요.자식 농사만큼은 잘한 것 같아요."
# 은퇴 후엔 가족들과 여행하고파
-은퇴 후 계획은
"아직까지는 은퇴를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다만 언제 떠나도 미련은 없다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어요.남보다 더 오래 일을 해왔다는 데 보람과 행복을 느끼고 있고요.은퇴를 한 뒤에는 사회경험과 지식·인생 노하우 등을 모아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어요.또 가족들과 여행도 다니고,손자들과도 많은 시간을 보내고픈 소박한 꿈도 갖고 있죠.그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소원했던 지인들과도 좋은 시간을 나누고 싶어요."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대우건설을 인수하면서 국내 부동의 1위 건설업체를 이끄는 막중한 임무를 맡아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새로운 도전이라는 측면에서는 설레기도 하고 의욕도 생깁니다.금호건설과 대우건설을 세계 건설업계 10위 안에 올려 놓고 은퇴하고 싶은 게 제 욕심입니다.현재 30위권 정도니까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봅니다.계속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리=이정호 기자/사진=김병언 기자 dolp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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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부회장은...
1945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다.
광주고등학교(1963년)와 서울사범대 수학과(1971년)를 졸업하고 1972년 대한항공 전산직 공채 1기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뒤 삼환기업,한국신용평가 등을 거쳐 1988년 아시아나항공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아시아나항공 전무이사(1994년)와 정보통신사업담당 부사장(1996년)을 역임하고 금호엔지니어링 대표(2001년)로 첫 CEO 자리에 올랐다.
2005년 금호산업 건설사업부 대표이사 부회장 직을 맡으며 대우건설 인수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골프는 싱글,주량은 폭탄주 5~6잔,애창곡은 '행복이란','추풍령','누이' 등이다.
< '디지털CEO' 신훈 금호아시아나그룹 건설부분 부회장 >
'IT 지식으로 무장한 디지털 CEO.' 신훈 금호아시아나그룹 건설부문 부회장(62)을 설명할 때면 빠지지 않고 항상 따라붙는 수식어다.
신 부회장과 일면식이 없는 사람은 그의 화려한 이력만 보고 차가운 사람이라는 인상을 가질지 모르지만,실제 그는 구수한 된장찌개같이 소박하고 인간적이다.
연간 매출액이 7조원을 넘는 대우건설과 금호건설을 함께 끌어가는 총사령관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새삼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노력 없는 대가는 없는 법.중저음의 바리톤 목소리로 풀어 놓는 신 부회장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듣다 보면 지금의 자리는 도전하고 경쟁하며 고비를 넘겼던 치열한 삶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이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지난달 26일 세종문화회관 뒤쪽 한정식 집에서 6시간 넘게 이어진 신 부회장과의 정담은 진지한 한 편의 다큐멘터리 같은 짙은 여운을 남겼다.
# 베트남 정도는 무박으로 출장
-대우건설을 인수해 국내 최대 건설업체의 최고경영자(CEO)가 되셨는데 어떻게 지내십니까?
"지난 한 달 사이에만 베트남,중동,아프리카를 거쳐 미국까지 갔다왔다 했어요.말 그대로 하늘에 붕 떠 있는 느낌이랄까요.하루에 한 번씩 시차가 바뀌더라고요(웃음). 베트남 같은 경우는 무박2일,무박3일로 다녀와요."
-건강에 신경을 쓰셔야겠습니다.
"운동이 최고죠.시간을 일부러 내서라도 운동을 해요.해외에 나가면 호텔 피트니스센터에서 매일 러닝머신으로 1시간 정도씩 정기적으로 운동을 합니다.국내에서는 아무리 늦게까지 술을 먹어도 집에 들어가서는 반드시 1시간 이상 자전거를 탑니다.잠은 5시간 이상 안 자요. 밤 12시나 새벽 1시 사이에 자고 오전 5시30분에 기상한 뒤 7시20분이면 출근해요. 습관이 몇 십년간 몸에 배니까 오히려 편해요."
-주량이 맥주 1병이라던데요.
"술이란 게 먹으면 늘더라고요. 건설업계에 오기 전만 해도 치사량은 맥주 2잔이었는데 요즘은 폭탄주 5~6잔까지 마셔요. 폭탄주를 먹다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몇 번 있긴 하지만.한때는 모임 때마다 박삼구 회장께서 거꾸로 제 술을 대신 마셔주신 적도 있어요. 아버지,형제들 모두 술을 입에 못 댑니다. 집안 내력이죠.술자리에서 날 배려해주면 골프칠 때 대신 핸디를 줍니다(좌중 웃음)."
-어렸을 때 공부 잘 하셨죠?
"1등을 빼앗겨 본 적이 없지요. 전남 장흥에서 5학년 1학기까지 다니다 광주로 유학왔어요. 광주 서석초등학교로 전학갔는데 시골에서 왔다고 얼마나 차별이 심하던지.성적 순으로 1~6분단까지 나누는데 전학 한 달 만에 1분단으로 갔어요. 졸업할 때는 전교대표로 졸업장도 받았죠."
# 고교때 전국 수학경시대회 1등
-대학은 수학과를 가셨네요.
"4남1녀 중에 넷째였는데 큰형님이 의대에 가셨어요. 구청 공무원인 아버지한테는 형님 학비만 해도 빠듯했죠.그러니 나머지 형제들은 대학에 갈 형편이 안 됐어요. 고등학교 졸업 무렵 경희대에서 전국 고교학력경시대회를 열었는데 학교대표로 나가 수학 부문 전국 1등을 했어요. 1등한테 원하는 학과에 4년간 무료 장학금을 준다기에 경영학과에 들어갔죠.그런데 적성이 안 맞아서 1년 뒤에 서울 사범대학 수학과에 다시 들어갔어요. 학비가 싸서 부담이 많지 않았어요. 그때 커트라인이 의대와 같았죠."
-수학을 좋아하셨나 봐요.
"고1 때 수학선생님이 굉장히 엄했어요. 어느 날은 어려운 문제 하나를 칠판에 써놓고 번호대로 한 사람씩 나와서 풀게 하는데 내 번호 앞까지 아무도 못 풀더군요. 2차함수 근의 공식을 구하는 증명이었는데 내가 수업이 끝나는 종이 칠 때까지 45분간 풀었죠.선생님도 놀라더라고요. 인정을 받으니까 더 열심히 했죠.그 수학선생님 때문에 수학에 빠져들었어요."
-대학 때는 사업도 하셨다고 하던데요.
"당시 모 신문사에서 지방 고학생들을 위해 두 줄짜리 광고를 공짜로 내주곤 했어요. 그래서 '전국 수학경시대회 1위,서울대 사대수학과' 이렇게 딱 두 줄 광고를 냈는데 전화에 불이 나더군요. 그 중에 조건이 좋은 곳을 골라서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갔죠.그리고 20명을 모아서 사설 수학학원을 하나 차렸어요. 서울 돈암동 다락방을 하나 빌려서 학원을 운영했는데 그때 월수입이 20만~30만원이었어요. 대기업 초임 월급이 2만원일 때니까 엄청난 고소득자였던 셈이죠."
# 대한항공 전산직 공채 1기로 출발
-첫 직장이 대한항공이었죠?
"졸업하고 컴퓨터학원 강사로 있는데 마침 대한항공하고 금성사에서 전산직 공채를 하더군요. 항공사 일이 좀 더 전망 있어 보여서 대한항공을 선택했죠.전산직 공채 1기였는데 내가 할 일은 온라인 프로그램 개발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항공 예약 시스템이란 게 직원들이 일일이 손으로 적고 지우는 원시적인 형태였습니다. 당시 조중훈 회장께서 나에게 온라인 프로그램 개발이라는 특명을 맡겨 입사 1년 만에 캐나다 시스템 업체로 유학을 떠났어요."
-개발은 잘 됐나요.
"캐나다에 처음 가니까 미개국가에서 왔다고 연구에 끼어 주지도 않고 엄청 무시하더라고요. 밴쿠버에 한국 교민이 4명인가 있던 때였거든요. 어느 날 연구실 컴퓨터가 고장 나서 애를 먹었는데 내가 나서서 고치니까 그때부터 인정해 주더군요. 매일 밤마다 프로그램 관련 책과 매뉴얼을 몰래 카피해서 호텔에서 새벽까지 열심히 공부했죠.얼마 뒤 국내에 돌아와서 전산팀 주도로 2년6개월 만에 전 업무에 온라인을 적용했어요. 전 세계 항공사들이 깜짝 놀랐죠."
-대한항공 이후 몇 번 직장을 옮기셨네요.
"내 사주팔자에 직장 역마살이 있나 봐요 (웃음). 대한항공에 11년 있으니까 좀 근질근질거리더라고요. 몸이 편할 만하면 남이 안 해본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보자는 생각이 자꾸 들었어요. 마침 삼환기업이라는 건설업체가 중동에 막 진출할 때인데 공정관리를 컴퓨터로 해야 한다고 나보고 좀 와 달라고 하더군요. 그때 건설업계 업무를 좀 파악했지요. 몇 년 지나니까 전 경제부총리인 이헌재씨가 날 한국신용평가로 부르더라고요. 기업평가를 위한 과거 20년간 재무제표를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일이었죠.그러다 1988년 아시아나항공 출범에 맞춰 스카우트돼 금호아시아나그룹과 인연을 맺었어요."
# 아시아나서 가정예약 시스템 첫 개발
-아시아나항공 근무 당시 얘기 좀 해주세요.
"업계 처음으로 온라인 예약 시스템을 만든 게 가장 기억 나요.후발주자인 아시아나항공이 대한항공과 경쟁하려면 기존 영업방식으로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가정 예약 시스템이었어요.마침 하이텔,천리안 등 통신망이 깔리는 등 딱 환경이 맞아떨어졌거든요.통신망 접속을 통해서 가정에서 항공권을 예약할 수 있는 온라인 마케팅을 처음 선보인 거죠.온라인 시장을 선점하고 대한항공과 차별화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계기였어요."
-IT와 뗄 수 없는 삶이시네요.
"맞아요.내 인생에서 수학과 IT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어요.지금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니까.특히 아시아나항공 CIO(최고정보관리책임자) 경험이 큰 재산이 됐어요.각 프로세스를 분석하고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바로 회사 경영과도 직결되기 때문이죠.어떤 문제를 대할 때 해결 방안을 도출하는 속도도 빨라지고요.맹목적인 목표가 아닌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직원들을 설득하니까 직원들도 더 믿고 따르는 것 같아요."
-그룹에서 건설부문은 어떻게 맡으셨습니까.
"그룹에서 2002년 1월부터 갑자기 건설을 맡기더군요.워크아웃 직전까지 몰렸던 업체라 회사 상황이 말이 아니었죠.은행 부채만 8000억원이 넘었으니까요.CEO를 맡고 처음 찾아간 곳이 모 은행장인 학교 선배였어요.2000억원만 도와 달라고 하니까 부도날 회사를 어떻게 지원하느냐고 일언지하에 거절하더라고요.제2금융권을 돌아다니며 긴급 자금을 지원받아 겨우겨우 운영했지요.돌이켜 보면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잘 따라와 준 직원들이 고마워요."
# 직원들과는 '눈높이 대화'
-직원들과의 교감을 중시하신다고요.
"직원들에게는 기본적으로 감성적 접근이 필요해요.직원들은 20대부터 60대까지 있으니까 그에 맞춘 교감 방법이 필요하죠.대학생이 초등학생하고 대화를 하려면 대학생이 초등학교 수준에 맞추는 수밖에 없잖아요.젊은 직원들과 서로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서로 교감을 쌓는 일도 경영의 주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회사가 어려웠을 때도 직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매년 봉급 인상과 진급을 약속했죠.직원들의 감동을 이끌어내고 의욕을 갖게 해주는 것 또한 CEO의 주요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성공비결을 꼽으신다면.
"집념과 도전정신입니다.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내 좌우명이 된 문구가 있어요. '청년아 불평을 하지 말고 울지를 말어라.노력 인내야말로 쓰라린 인생을 광명으로 이끄는 참된 안내자다.살아서 굴욕과 천대와 멸시를 받음보다는 차라리 분투 중에 쓰러짐을 택하라.' 좌절을 두려워하지 말고 집념을 갖고 싸워 부딪치면 좋은 결과가 따라옵니다."
-자녀 교육은 어떻게 하셨나요.
"딸 하나 아들 하나 있는데 무난하게 잘 자라줬어요.조금 손해를 보는 일이 있더라도 항상 상대방에게 양보하는 미덕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죠.이런 가르침을 잘 따라준 것 같아요.자식 농사만큼은 잘한 것 같아요."
# 은퇴 후엔 가족들과 여행하고파
-은퇴 후 계획은
"아직까지는 은퇴를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다만 언제 떠나도 미련은 없다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어요.남보다 더 오래 일을 해왔다는 데 보람과 행복을 느끼고 있고요.은퇴를 한 뒤에는 사회경험과 지식·인생 노하우 등을 모아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어요.또 가족들과 여행도 다니고,손자들과도 많은 시간을 보내고픈 소박한 꿈도 갖고 있죠.그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소원했던 지인들과도 좋은 시간을 나누고 싶어요."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대우건설을 인수하면서 국내 부동의 1위 건설업체를 이끄는 막중한 임무를 맡아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새로운 도전이라는 측면에서는 설레기도 하고 의욕도 생깁니다.금호건설과 대우건설을 세계 건설업계 10위 안에 올려 놓고 은퇴하고 싶은 게 제 욕심입니다.현재 30위권 정도니까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봅니다.계속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리=이정호 기자/사진=김병언 기자 dolp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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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부회장은...
1945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다.
광주고등학교(1963년)와 서울사범대 수학과(1971년)를 졸업하고 1972년 대한항공 전산직 공채 1기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뒤 삼환기업,한국신용평가 등을 거쳐 1988년 아시아나항공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아시아나항공 전무이사(1994년)와 정보통신사업담당 부사장(1996년)을 역임하고 금호엔지니어링 대표(2001년)로 첫 CEO 자리에 올랐다.
2005년 금호산업 건설사업부 대표이사 부회장 직을 맡으며 대우건설 인수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골프는 싱글,주량은 폭탄주 5~6잔,애창곡은 '행복이란','추풍령','누이'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