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군대에 입대하여 논산 훈련소에 있었을 때의 일이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여름 한낮 연병장에 잡초 제거 작업을 마친 훈련병들이 앉아 있었다.

누군가가 농담처럼 내뱉는다.

"야,이런 날 선착순으로 연병장이라도 돌게 한다면 정말 미쳐버릴 거야."

농담이 씨가 되었을까? 멀리서 다가오던 훈련조교가 "연병장 5바퀴,선착순 15명"을 외친다.

훈련병들이 정말 미치기라도 한 것처럼 연병장을 돌기 시작한다.

5바퀴를 마치고서는 선착순 줄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줄의 앞에 서기 위해 모든 훈련병들이 달려든다.

앞서 들어온 동료 훈련병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뒤에 들어오는 동료들이 끼어들지 못하게,혹은 조금이라도 줄의 앞쪽에 서기 위해 모두들 필사적이다.

상황이 정리될 즈음,훈련 조교가 한마디 더 외친다.

"선착순 15명을 제외하고 연병장 5바퀴,선착순 15명." 다음 5바퀴가 끝날 즈음의 선착순 줄 역시 비슷한 풍경을 보여준다.

그리고는 훈련조교의 훈계 말씀."너희들 모습을 봐라.전우애라고는 하나도 없어가지고….이렇게 전우애가 없는 녀석들이 어떻게 서로를 믿고 군 생활을 할 수 있겠나?"

하버드대학의 경제학 교수인 맨큐 (Gregory N. Mankiw) 가 쓴 "경제학 원론"의 첫머리에는 그가 나름대로 정리한 경제학의 주요 원칙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사람들은 유인의 변화에 반응하여 행동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행위를 할 때,그 행위가 가져올 편익과 비용을 고려하여 행동한다.

(적어도 경제학은 그렇게 주장한다.) 만약 그 편익과 비용이 바뀌면 사람의 행동은 바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훈련소에서의 경험을 예로 들어보자.서로 앞에 서기 위해 달려드는 행위의 비용은 아마도 자기와 절친한 동기들을 밀어내야 한다는 양심의 가책 정도가 될 것이다.

그 행동의 편익은 햇볕 쨍쨍한 연병장을 다섯 바퀴나 더 돌 필요성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 날의 날씨가 조금 덜 더웠거나,뛰어야 할 바퀴 수가 다섯 바퀴가 아닌 한 바퀴였더라면 앞에 서려는 행위가 가져다 줄 편익은 줄어들 것이고,그때의 훈련병들이 그렇게 필사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유인 구조에서 훈련병들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행동을 한 것이고,그것이 마치 서로의 전우애가 박약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일 따름이다.

만약 그 훈련 조교가 다른 방식으로 '선착순' 과업을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훈련병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고,연병장 5바퀴를 가장 늦게 돈 훈련병이 속한 그룹은 다시 다섯 바퀴를 돌아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자기 그룹에서 가장 늦게 달리는 훈련병 옆에 붙어 그를 격려하고 도와주지 않았을까? 그렇게 되면 우리들은 아주 전우애가 깊은 훈련병이라고 칭찬받았을지도 모른다.

전우애(?)가 있는 행동이 나오고 안 나오고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 훈련 조교가 전우애가 있는 훈련병들을 보고 싶었다면,전우애가 보이는 행동을 할 수 있는 과업을 주었으면 될 것이다.

물론 그 상황에서도 '햇볕 쨍쨍하고 무더운 연병장 5바퀴를 더 돌아야만 하는 고통'을 넘어서는 전우애를 강조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식의 강조를 여러 곳에서 본다.

하지만 경제학자는 어떤 행동의 유형을 볼 때,전우애나 도덕심의 관점에서 보다는 어떤 유인구조가 이런 행동을 낳았는지에 더 관심을 가지며,이런 관점은 때로는 아주 유용한 해결책을 줄 때가 많다.

물론 도덕심 같은 것이 사람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며,테레사 수녀 같은 성인들은 항상 존재한다.

하지만,평균적인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사람들의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유인 구조를 가지고 있느냐를 보는 것이 더욱 유용하다고 경제학자들은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학자들은 사람보다는 먼저 제도나 시스템을 앞세운다.

누군가의,혹은 어떤 집단의 도덕성을 탓하는 이야기들은 항상 있다.

이제 그런 이야기들에 앞서 어떤 유인 구조가 이런 행위를 낳았는지,그리고 제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 것이 그런 행위를 방지할 수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