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은 사실 타학문으로부터 많은 것을 빌려왔다. '탄력성'이라는 개념은 기계공학에서,'균형'이라는 개념은 물리학에서 각각 차용했다. 일부 경제학자들이 사용하는 '진화'라는 용어 역시 생물학에서 따온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경제를 생물세계와 비교하는 일이 유행처럼 번지자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이를 비판한 적이 있다. 단순한 은유나 비유를 넘지 못한 채 생물학적 용어들을 마구 원용하고 있는 현상(bio-babble)을 꼬집은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모두 전통경제학의 한계 때문에 비롯된 일이다. 어쨌든 그후 일부 경제학자들은 이런 비판을 의식한 듯 진화경제학,복잡계 경제학 등 보다 구체적 모델과 방법론을 위한 후속연구들을 계속하고 있다.

요즘 경제,산업,기업 차원에서 공통된 키워드를 꼽으라면 단연 '융합(fusion)'이다. 국내외 미래예측에서 융합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적어도 앞으로 수십년간은 그것이 기술이건 제품 또는 서비스이건 융합에서 성장동력이 나올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게 맞다면 당연히 산업도,경제도 여기에 따라 좌우될 게 분명하다.

문제는 기술 제품 서비스 등 업종을 세세히 구분하는 기존의 경계가 견고히 유지되는 한 융합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경계를 무너뜨리는 힘과 이에 저항하는 힘이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융합의 범위나 속도가 달라진다는 얘기다.

우리는 지금 어느 쪽 힘이 더 강한 것인가. 그렇게 긴 세월을 허비하고도 아직 산으로 가는 건지 바다로 가는 건지 알 수 없는 방통융합 갈등을 보면 답이 저절로 나온다. 이뿐이 아니다. 영역을 구분짓고 다투는 건 연구나 교육이라고 하등 다를 게 없다. 여기저기서 융합을 말하지만 정작 이에 대한 국가적 준비 수준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

다시 진화 얘기로 돌아가 보자. 생물학의 진화 개념이 경제현상을 설명하는데 유용하다면 그 핵심은 진화의 기본 알고리듬(algorithm)일 것이다. 바로 차별화(differentiation)→선택(selection)→증폭(amplification)으로 이어지는 과정의 반복이다. 환경변화가 일어나면 이에 적응하기 위한 변종(variant)들이 튀어나와 서로 경쟁을 하고 여기서 가장 적합한 변종이 선택된다. 선택된 변종은 자기복제(replication)를 통해 집단 내에서 확산되고,그 결과 집단 전체의 환경 적응도(성과)도 올라간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첫단계인 차별화부터가 문제다. 환경 변화의 본질이 융합이라면 기존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변종들이 나와주어야 하는데 이게 막혀있는 것이다. 여기서 정부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칸막이를 토대로 하는 법과 제도,규제의 틀을 고수하는 한,또 정책과 조직이 융합에 맞게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우수 변종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 진화의 알고리듬 자체가 작동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소멸을 의미한다.

앞으로는 방송과 통신은 말할 것도 없고 제조업과 서비스업,IT와 비(非)IT,금융과 비금융,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할지 모른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지금 우리는 중요한 기로에 서있다.

논설위원·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