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 한국기업이라면 모조리 블랙리스트(대출 금지 대상)에 올렸는지 빌린 돈을 갚으라고 합니다.

이자도 잘 내왔는데 이제 어떡하죠…."

지난 11일 중국 칭다오시의 공장 밀집지역인 자오저우산업단지에서 만난 봉제공장 사장 K씨는 "힘들어도 열심히 해보려고 했는데 은행들이 빡빡하게 나와 앞날이 캄캄하다"고 한숨을 쉬었다.

단지를 가로지르는 10차선 하이얼다다오의 한쪽에서 4년째 공장을 돌리고 있는 그는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더니 18일 베트남의 한 지방 성정부가 칭다오에서 한국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투자설명회에나 참석해볼 작정이라며 공장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곳에서 몇 블록 떨어진 한 기계설비업체.회사 바로 옆에 철골만 앙상하게 서 있는 공사장은 이 회사의 신규공장 건설현장이다.

은행이 돈을 빌려줄 줄 알고 공사를 시작했는데 못 빌려주겠다고 해서 지난달 말 일단 공사를 중단했다는 게 회사측의 설명이다.

지난달 한국의 중견 피혁회사인 신오피혁과 신일피혁의 사장과 주재원 30여명이 집단으로 야반도주한 뒤 칭다오시에서는 대기업 계열사를 제외한 1만2000여개 한국기업들이 현지은행으로부터 냉대를 당하고 있었다.

중국은행 산둥성총행(산둥성 지점총괄)은 최근 외자기업의 경영실태를 전면 조사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사실상 한국기업을 겨냥한 조치다.

농업은행은 칭다오에 있는 한국기업의 신용도를 일률적으로 한 단계씩 내렸다.

기존 대출을 조기에 환수하고 여의치 않을 때는 만기연장을 해주지 말라는 방침도 하달됐다.

농업은행 자오저우분행 관계자는 "부동산담보 외에 설비나 신용담보 대출은 앞으로 엄격한 규정이 적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뿐 아니라 세관도 한국기업에 등을 돌렸다.

그동안 관행적으로 받지 않던 수입보증금을 무조건 징수한다는 지침을 세웠다.

공장을 빌려준 주인들은 혹시 전기료를 떼먹고 도망가지 않을까 선납하라는 요구도 하고 있다.

한국기업이 이처럼 '몰매'를 맞는 이유는 두 회사의 집단도주사건으로 현지 은행과 세관 등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은행대출금과 세관보증금 등 피해액이 2억위안(한화 25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게다가 이런 야반도주는 처음이 아니다.

자오저우지역에서 2년 전 한 한국기업인이 1200만달러(한화 110억원 상당)를 대출받아 도망가는 등 산둥성의 여러 지역에서 크고 작은 사고가 이어지고 있다.

환경규제,임가공산업에 대한 수입관세면제 취소 등 경영환경이 나빠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조광특수밸브 안성환 대표는 "이번 사고는 달라진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기업인이 아주 나쁜 방식으로 사업을 정리한 케이스"라고 설명했다.

칭다오 총영사관 박환선 영사는 "한국기업들이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중국의 청산절차가 복잡한 것도 있지만 사실 불법이나 탈법경영을 해왔기 때문에 정상적인 청산이 힘든 측면도 있다"며 "이번 사고로 대출금 상환압력이 커지는 등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지만 최근 몇년간 많은 기업들이 준법경영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만큼 이른 시간 안에 안정을 찾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실제 환경 악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칭다오를 찾는 기업인들이 적지 않다. 3000만달러 규모의 알루미늄 휠 공장 건설을 위해 부지 물색차 자오저우에 왔다는 동화상협 신현범 이사는 "칭다오는 물류 인프라 등을 볼 때 매력적인 투자지역"이라고 말했다. 두 피혁업체의 야반도주가 이런 기업인들의 기마저 꺾지 않을까 걱정된다.

칭다오=조주현 특파원 fore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