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공보실에서 일하고 있는 김한중 차장(45)은 올해 2월이면 한국은행에 근무한 지 만 20년째다.

연봉이 8000만원을 넘는 그는 경기 안양에 있는 자기 소유 아파트에서 아내와 함께 두 아이를 키우며 별 어려움 없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강남에 집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친구들로부터 왜 강남에서 살지 않느냐는 말을 자주 듣는다"며 "살아가는 데 여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강남 집값을 쳐다보면 내가 중산층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중간 소득자도 "중산층 아니다"

중산층이란 소득이나 자산금액과 같은 객관적인 통계만으로 엄격하게 구분지을 수 있는 개념은 아니다.

물질적인 생활수준 뿐만 아니라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이 중산층이라는 의식 규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소는 중산층에 대해 '사람답게 살고 있다는 의식과 이에 필요한 경제력을 구비한 계층'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경제력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주관적인 만족감이 중산층을 구분짓는 핵심적인 기준이라는 얘기다.

이같은 기준으로 봤을 때 우리 사회에서 중산층 의식은 외환위기 이후 급속하게 무너졌다.

옛날에는 소득을 기준으로 중·하층에 속해 있던 사람들도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자부했는데,요즘에는 남들이 보기에 중·상층이 분명해 보이는 사람들조차 "나는 중산층이 아니다"며 괴로워하고 있다.

우리나라 가구의 월 평균 소득은 305만원이고,소득이 많은 사람 순으로 줄을 세웠을 때 가운데 있는 사람의 월평균 소득은 267만원이다.

이 정도 소득을 갖고 있다면 중산층으로 자부할만 한데도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부동산 격차가 중산층 의식붕괴

외환위기 이후 기술·사무·관리직 등 우리 사회의 중산층으로 볼 수 있는 직장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단행되면서 중간층 소득자들의 비중이 줄었다.

'나도 언젠가 구조조정을 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졌고 미래에 대한 자신감도 줄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부동산가격의 양극화는 중산층 의식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서울 강북에 살거나 연립주택에 거주하더라도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지 않았고 중산층이라는 자부심도 얼마든지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지역에 사느냐에 따라,갖고 있는 집이 아파트냐 연립주택이냐에 따라 집값에 엄청난 격차가 생기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서울 강남과 강북 지역의 아파트 가격 격차는 1990년대말까지만 해도 20%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불과 5년여만에 강남과 강북의 집값은 두배로 벌어졌다.

서울 강남으로 진입하는 것 자체가 거대한 벽이 됐다.

종합부동산세를 낼 정도는 돼야 중상류층이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기준시가 6억원 이상 아파트에 부과되는 종합부동산세는 우리 사회의 새로운 '계급장'으로 변질되고 있다.

장세훈 동아대 교수(사회학)는 그의 논문 '중산층은 없다―주택소유의 관점에 입각한 중산층의 재해석'에서 "자가 소유만으로는 경제적·심리적 안정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며 "자산을 늘릴 수 있는 부동산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새로운 중산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주택으로 재산을 불릴 수 있는 서울 강남이나 수도권 일부 지역의 자가소유 가구가 새로운 중산층으로 자리잡게 됐다는 분석이다.

계층 고착화 위기감 가중

더 큰 문제는 평생 열심히 노력해도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좌절감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통계청의 의식조사에 따르면 자신의 노력으로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 수 있다고 본 가구주는 27.5%에 그친 반면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대답한 비율은 절반에 가까운 46.7%였다.

지역별 교육격차와 빈부격차 확대 등이 신분상승에 대한 자신감을 떨어뜨리고 있다.

경제성장률이 낮아지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연간 7% 성장했던 2002년에는 일자리가 59만7000개 늘었으나 성장률이 3.1%로 반토막이 났던 2003년에는 일자리가 3만명 감소했다.

경제성장률이 낮아지면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지난해 일자리는 29만5000여개(11월말 기준) 정도밖에 늘어나지 않았다.

올해도 늘어나는 일자리는 25만개 정도에 그칠 것으로 예상될 뿐이다.

일자리가 많이 늘어나지 않으면 중산층이 튼튼해질래야 튼튼해질 수가 없다.

세금과 사회부담금 등 비소비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는 것도 중산층 기반을 무너뜨리는 또 다른 요인이다.

가계소득을 5등분했을 때 3분위 계층의 2006년 3분기 가구당 월평균 소득은 267만원으로 2003년말에 비해 12.3% 늘어났지만 비소비지출은 36만원으로 40.2%나 증가했다.

중산층의 소비여력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

현승윤 기자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