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경 기자들과 새벽 1시30분까지 생맥주 인터뷰 ]

이채욱 GE코리아 회장(60)은 20일 오후 9시30분께 불그스레한 얼굴로 나타났다.

임직원들과의 저녁 송년회 자리에서 한잔 걸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이 회장은 앞서 한국경제신문이 'CEO들의 세상사는 이야기'를 통해 연재했던 이기태 삼성전자 사장,박찬법 금호아시아나 부회장,구학서 신세계 부회장의 이야기를 꼼꼼히 읽어봤다며 "한경이 참 좋은 기획을 했는데 저 같은 사람이 나가서 되겠습니까"라고 겸양을 나타냈다.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처럼 푸근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절제와 노력으로 자신을 연마한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맑은 눈빛과 이마는 그가 왜 세계 초일류 기업의 최고경영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이 회장과의 인터뷰는 한국경제신문 인근 조그만 생맥주 집을 통째로 빌려 밤 1시30분까지 4시간 동안 이어졌다.


-인터뷰를 위해 마시는 술값은 한경 기자들이 부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마음껏 드십시오.

"아이고 그럼 비싼 데 가자고 할 걸 그랬네.(좌중 웃음) 싼 곳에서는 우리가 내고….GE 사람들은 비싼 곳에서 돈 못 쓰거든요.

윤리 규정이 강화돼 가지고 '공무원하고 밥 먹을 때는 1인당 3만원 이상 쓰지 마라','부조는 10만원을 넘으면 안 된다'….얼마 전에 LG전자 최고경영자로 선임된 남용 부회장에게 축하한다고 15만원짜리 화분을 보내려고 했는데 규정에 어긋난다고 10만원짜리로 하라는 거예요."

-삼성과 GE를 오가며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고 계신 걸로 아는데,사람을 사귀는 비결이 따로 있는 것입니까.

"비결이란 게 특별히 있겠습니까.

(투박한 상주 사투리) 처음 사람을 만났을 때 기억에 남기기 위해 노력하죠.그 사람의 특징을 찾아내고,외국 사람 같으면 이름에서 연상되는 것을 기억하고요.

때로는 한 번 만났던 사람을 다시 만났는데 기억을 못하는 경우가 있죠.굉장히 큰 실례 아닙니까.

그럴 때는 되물어요.

대단히 죄송하지만 어디서 뵈었는지 기억을 잘 못하겠다고요.

솔직한 것이 가장 좋아요.

일반적으로 인간 관계를 맺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솔직하게 말하고 이해하고 그러면 되는 것 아닌가요."

-얼마 전 출간하신 '백만불짜리 열정'에서 개인이든 기업이든 성장하기 위해서는 열정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열정이란 무엇입니까.

(맥주를 겨우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 질문이 조금 어렵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신바람나게 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열정 아닙니까.

힘들고 싫더라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매달려 보는 것…그렇게 해서 성과를 내면 또 그 힘으로 더 어려운 일에 도전해 보려는 마음가짐이 열정이겠지요."(역시 대답하는 것이 조금 힘겨워 보인다)

#시련을 딛고

-자 한 잔 쭉 들이켜고 옛날 얘기 좀 하지요.

자서전을 보면 고등학교 때 학비가 없어 중간에 학교를 그만두신 적이 있는데요.

그런 시련 속에서도 긍정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습니까.


"상주고등학교에 처음엔 장학생으로 입학했는데 1학년 마치고 성적이 모자라서 장학생 자격을 잃었어요.

그래서 이듬해 6월까지 학교 등록을 못했죠.그런데 중학교 때 교장 선생님이 추천을 해 주셔서 마을에 있던 적십자병원 원장댁에 가정교사로 들어갔어요.

그때 다른 사람들은 저를 보고 어린 애가 남의 집에 들어가서 눈칫밥 먹고 고생한다고 그랬어요.

근데 난 사실 굉장히 좋았어요.

(목소리가 높아진다) 생각해 보세요.

부잣집에서 쌀밥에 고기 먹고 내 방도 있고.항상 신바람이 나지.내가 처해 있는 환경이 나쁘다고 생각하면 한이 없어요."(어쩔 수 없는 낙관파)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면사무소 서기가 되는 것이었어요. 시골에서는 그게 최고였죠. 그러다 담임선생님이 영남대학교에서 4년 장학생을 모집한다는데 시험을 한 번 보라고 해서 법학과에 입학했고요. 대학생이 됐으니 또 얼마나 신바람이 났겠습니까. 항상 콧노래가 나오는 거야. (이 회장은 인터뷰 도중 '콧노래'라는 표현을 자주 인용했다)자기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이 주어졌을 때는 기쁘죠. 어떤 상황 속에서든 항상 현실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하다 보면 인생의 터닝 포인트(전환점)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봐요."

-대학 때는 생활비를 어떻게 마련하셨어요.

"그때도 가정교사를 했죠. 근데 대학 들어가서는 가정교사를 쉽게 구했어요. 내가 골라서 할 정도였으니까. 왜냐면 난 고등학교 때 입주 가정교사를 했던 경력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평판도 괜찮았던 모양이에요."

-군대 생활은 어디서 하셨습니까.

"대학 3학년 때 지원해서 갔는데 헌병 병과를 받았어요. 법학과 다니다 왔다고 헌병을 시키더라고요. 그러다 나중에 베트남 파병을 지원해서 다녀왔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해서 대학 다닐 때까지 늘 가정교사를 했는데 군에서 제대하고 나서도 가정교사를 할 생각을 하니 좀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대요.

그래서 베트남을 간 거죠."

-결국 돈 때문이었나요.

"그때가 1968년이었는데 베트남에 가면 병장 월급이 한 달에 54달러였어요. 13개월간 있었으니까 많이 벌어왔죠.1972년에 삼성에 처음 입사했을 때 수습사원 월급이 2만5000원이었어요. 당시 환율로 따져서 54달러면 2만원 정도였겠지요. 삼성 월급보다는 못했지만 꽤 큰 액수였죠."(무척 뿌듯해 하는 표정이다)

#삼성에서 GE로

-삼성물산에 근무하다 GE와 삼성의 합작회사(삼성GE의료기기)로 가셨을 때 이야기 좀 해 주세요.

"1989년 삼성물산 해외사업본부장을 하고 있던 때였어요.

송년회를 하고 술이 잔뜩 취해서 들어왔는데 당시 이필곤 삼성물산 사장님이 보자고 하세요. 말씀 하시기를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는데 저를 삼성GE의료기기로 보내려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해외사업본부장으로 정말 일을 잘하고 있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는데,갑자기 그러니까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복잡해지대요."

-왜 하필 회장님을 보내셨을까요.(혹시 좌천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회사가 1984년에 설립돼 4년 동안 해마다 적자를 냈어요. 문제가 많았지요.

첫 출근해서 이사회를 열었는데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삼성측 사람들과 GE 측 사람들이 서로 '네 탓'이라며 싸움만 하고 있더라고요.

공장 가동률은 27%밖에 안 되고….제가 영어를 잘 하고 예전에 다른 해외 합작법인에 근무했던 경험도 있고 하니까 제게 덜컥 맡긴 것 같아요."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을 텐데.

"어차피 내가 맡았는데 싫다고 생각하면서 일해봐야 남는 게 뭐가 있겠어요.

어느날 백지 한 장을 꺼내놓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이 회사 사장을 맡아서 좋은 점이 뭘까.

며칠 동안 낙서하듯이 적다 보니까 좋은 점이 자꾸 떠오르더라고요.

회사 사정이 더 이상 나빠질 수도 없을 것 같고. 더구나 당시 시세로도 수십억원씩 하던 최첨단 의료기기 사업을 제가 언제 해 보겠어요.

그렇게 해서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꿨죠."

-긍정적인 사고는 타고 나신 모양입니다.

(자꾸 결론이 이쪽으로 모인다)


"제가 만나는 경영인들은 대부분 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이에요.

저는 그것을 '행운아 마인드'라고 하는데 행운아 마인드를 가지면 진짜 행운이 따라오는 것 같아요.

그러면 다시 의욕이 생기고…그게 긍정의 힘이죠."

#나의 연봉은?

-삼성 입사 동기들 중에 현역에 남아 있는 분들이 몇 분이죠.

"네 명 남았습니다.

삼성SDI의 김순택 사장,삼성토탈의 고흥식 사장,삼성정밀화학의 이용순 사장,대한육상연맹 신필렬 회장 등이죠."

-누가 제일 성공한 것 같습니까.

"에이,그런 게 있나요.

그 친구들은 나를 좋게 보죠. 위에서 간섭하고 그러는 게 덜하니까.

그 친구들이 봤을 때는 얼마나 부럽겠습니까.

하지만 자율이라는 게 더 힘들 때도 있어요."

-실례지만 연봉을 서로 비교해 보시지는 않습니까.

(가벼운 질문)


(의외로 무거운 대답)"제가 만약 저 자신을 채용하면 제가 지금 받는 것만큼의 연봉은 안 줄 것 같아요.

CEO는 스스로를 관리하는 잣대가 있어야 하는데 난 다른 데 가서도 그런 식으로 얘기해요.

당신은 당신을 채용하겠습니까.

채용한다면 연봉은 얼마를 주겠습니까.

늘 질문을 해 봐야죠."

-구체적으로 여쭙겠습니다.

(연봉을)어느 정도 받으십니까?


"허허 참.곤란하네…어쨌든 숫자를 말하기는 곤란해요.

만약 그런 질문을 스스로 해보면 노사문화도 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자꾸 돈을 갖고 얘기하지 마세요.

우리가 '페이(pay)'라고 하는 것이 지갑에 대한 것이 있고 가슴에 대한 것이 있고 머리에 대한 것이 있어요.

내가 하는 일이,내가 몸 담고 있는 조직이 비전이 있느냐,내가 이 일에 열정을 쏟을 수 있느냐 이런 데서 얻는 만족이 사실 엄청난 것 아닙니까.

지갑,가슴,머리가 모두 만족하는 게 좋은 것이죠."

# 편안함보다는 비전을 찾아야

-회장님은 어떤 스타일로 성공하셨다고 보세요.

머리가 좋으셨는지 아니면 성실하셨는지….

"저는 성실한 유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태도를 배우려 했고…. 내가 남보다 머리가 좋다든지 그런 것은 아니었고. 저는 열정에 덧붙여서 겸손을 늘 강조하는데 겸손이라는 것이 늘 남한테 배우는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직장을 다니면서도 여러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셨더군요.

"늘 자기 경쟁력을 생각해야죠. 평생 길러야 되는 게 경쟁력 아닙니까.

저는 지방 출신으로 서울에 와서 취직을 했는데 주변 사람들 보면서 '지금 내 위치가 어디 있는지' 끊임없이 되물었어요.

지방 출신이라 좋은 점은 다른 사람들이 나 같은 촌놈을 경쟁 상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지방 출신에 유명 대학 출신도 아니니까…. 또 주변에 훌륭한 사람들을 보면 물어보고 배우고 그랬어요."(서울 출신들이 들으면 좀 섬뜩하겠다)

-요즘 대학생들이 공무원이나 공기업을 선호하는 경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자신의 열정을 불태우고 싶어서 공기업을 택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안타깝죠. 저 같은 경우에 삼성물산에 입사할 당시 동명목재라고 하는 회사와 저울질을 하다 결국 삼성물산에 들어갔는데 아마 월급으로 치면 동명목재가 1.5배는 됐을 거예요.

그런데 좀 더 큰 일을 하고 싶었고 여러 가지 가능성 측면에서 삼성물산이 낫다고 생각해 동명목재를 포기했거든요.

지금 당장을 비교할 게 아니라 좀 더 멀리 보고 비전이 있느냐를 중시했죠. 요즘 편한 직장을 찾는 젊은이들이 많은데 그런 직장에서 편하게 살 수는 있겠죠. 그런데 그런 것만 볼 게 아닙니다."

-그간 살아오면서 아쉬움이 남는 일이 있다면요.

"제가 법대를 다니면서 고시를 해 봤으면 했어요.

그런데 사정이 안돼 결국 삼성에 입사를 하게 됐는데…아쉬움이라면 그런 정도네요."

-그래서 둘째 따님이 사법고시를 보신 건가요.

(이 회장의 둘째딸은 사법고시에 합격,현재 사법연수원에 재학하면서 검사 시보로 일하고 있다)

"(웃으면서)아마 그런 것도 있지 않았을까요."

# 가족 이야기

-와이셔츠는 어디서 맞추신 겁니까.

"작년에 우리 큰딸이 결혼을 했는데 그때 삼성플라자 지하에 있는 장미라사라는 유명한 집에서 아내가 네 벌을 맞춰줬어요."

-딸만 셋을 두셨어요.

여기 이 자리에 총각들도 많은데요.


"둘째딸도 곧 결혼합니다.

내년 3월에 결혼한다면서 제 짝을 데려와 인사를 시키더라고요.

요즘엔 부모가 결정권이 없잖아요."

-큰사위하고는 가끔 소주 한잔 하고 그러시나요.

"사위가 나한테 와서 바둑도 같이 두자고 하는데 아직 그 친구 실력이…. 가끔 와인도 한 잔씩 하고. 회사에서 행사를 하면 사위도 꼭 와요.

그런 건 외국계 기업이 참 좋은 것 같아요.

연간 목표를 세워 놓고 이걸 달성하면 하와이라든지 휴양지에서 가족 동반 모임을 갖는다든지 하죠."

-7남매의 장남으로서 고단한 청춘을 보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으셨어요.

"아버지가 좀 일찍 돌아가셨어요.

쉰여섯살에 가셨지요.

제가 회사에서 과장이 되기도 전에…. 돌아가시기 1주일 전에 뵈었을 때 손가락 하나는 쉽게 젖혀지지만 손가락을 모으고 있으면 잘 안 젖혀진다면서 형제 간의 우애를 강조하셨죠. 상을 치르고 바로 밑에 동생을 불러 제가 얘기했어요.

'내가 너의 학비를 대줄 테니 나중에 취직하고 나면 셋째 학비를 나하고 같이 대자.그리고 셋째가 돈을 벌면 넷째 학비를 나머지 세 사람이 대주자….' 다 그대로 됐어요.

그렇게 릴레이식으로 하니 제가 일방적으로 부담을 지지는 않았습니다.

형제들에게 고맙죠."